대구 석빙고 이야기
대구에는 2개의 석빙고가 있었다. 하나는 현존하는 “달성 현풍 석빙고(보물 제 673호)”로 1730년 (영조 6)에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1713년(숙종 39) 대구 판관 유명악(兪命岳, 1713~1716년 재임)에 의해 만든 석빙고이다. 현풍 석빙고보다 17년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풍 석빙고는 잘 보존되고 있는 데 비해 유(兪) 판관이 만든 석빙고는 대구읍성이 철거될 때(1907년)에 성벽과 함께 해체되어 일본인들의 가옥 신축에 사용되었고 빗돌만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다.
1714년(숙종 40) 석빙고 건립을 주관한 판관 유명악을 기리고 참여했던 사람들과 직책을 기록해 놓은 대구 석빙고 빗돌(경대 박물관 야외 전시장)
빗돌이 보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 일본 사람에 의해서였다. 1905년 경부선 개통되면서 대구는 조선에 진출해 돈을 벌려는 일본인의 황금어장(?)이었다. 따라서 많은 일본인이 몰려왔다. 그중에 후꾸나가 도꾸지로(福永德次郞)라는 사람이 석빙고가 파괴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 무렵 인천측후소장 와다유지(和田雄次) 박사가 대구에 내려왔다 후꾸나가 도꾸지로는 그에게 석빙고보존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의 내구(來邱)는 선화당 앞의 측우기를 가지고 가는 데 있었을 뿐 석빙고가 헐리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빗돌만 서문로 1가 78번지의 대구측후소로 옮겨 놓고 떠났다. 1916년 측후소가 적십자 병원 뒤 남산동 940번지로 이전할 때 비(碑)도 함께 옮겼다가 1937년 신암동 716-4번지로 이전할 때 다시 옮겼다가, 1973년 5월 30일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 야외전시관에 있다.
석빙고 비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모서리 하나 떨어진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오늘의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석빙고는 사실 백성들의 실생활과는 무관한 수령이나 그를 보좌하는 특권층만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유지관리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인 시설이었다.
석빙고가 어디에 있었던지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대구물어(大邱物語, 1930)』는 덕산정(현, 중구, 덕산동) 동산(돌산), 『달구벌(達句伐, 1977 대구시)』은 연구산 신민당 경북지부(현, 남산동 921-27 대구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 자리), 『대구설화(大邱說話, 박영규)』는 남문 밖 아미산-대구국민학교(현, 대구초등학교) 부근, 『대구신택리지(大邱新擇里志, 2007,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는 남산교회 북쪽 비탈면으로 비정(比定)했다.
다만 이 장소들이 모두 대구천(大邱川) 남쪽, 아미산 북쪽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얼음을 채취하여 운반하기에 용이하고 햇볕을 덜 받는 북사면이라는 점이 있다. 따라서 금호강에서 얼음을 채취했다는 혹자의 주장은 당시 교통 사정 등을 감안(勘案)할 때 동의하기 어렵다. 대구 석빙고 빗돌은 만들 때 참여한 사람과 각자의 임무만 기록해 놓은 현풍 석빙고 비와 달리 경위는 물론 주관한 판관 유명악의 공적을 기록해 놓은 특징이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빙실(氷室), 이는 백성의 근심이요 참으로 폐단이었다. 3년마다 1번씩 백성의 재력을 써서 고쳐야 했다. 생각하건 데 진흙과 짚 대신에 석재로 대신하고자 하나 다시 많은 비용을 거두기가 두려워 원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판관 유명악이 부임한 지 1년이 되지 않으나 은혜화 교화(敎化)를 능히 널리 퍼지게 하였고 민폐를 개혁하였으며 자재를 모아 공사를 시작하니 처음은 돌을 쌓아 바닥을 만들고 무지개형으로 지붕을 덮으니 대략 9칸으로 일을 마쳤다. 맹춘(孟春, 1월) 중순에 시작하여 수하(首夏, 4월) 그믐에 완성하였다. 백성들이 자식같이 와서 며칠 만에 일을 해내었다. 평소에 걱정하고 준비한 탓으로 기획하고 시행하는 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으니 일찍이 없었던 이 같은 일을 길이 자손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잊지 말게 할 것이다. 아! 끝내 마쳤도다. 이제 백성도 한 시름 놓게 되었구나. 처음 팔백(八百) 곡의 영미(營米, 경상감영의 비축미를 말하는 듯)를 빌려 그 경비에 충당하였다가 마친 뒤 관(官)의 비축으로 상환하여 백성들에게 거두지 아니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망극하도다. 하여 이 비라도 세워 그 뜻을 새겨 놓지 않는다면 그 위덕(威德)을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마침내 이를 위해 명(銘)하노니 명 왈(曰)
산에 난 돌을 깎아 (斲被雲根) / 우리의 큰 근심 덜었네. / (剗我巨瘼)
은혜는 하늘에 고루 퍼지고 (澤侔天弘) / 이름은 땅에 길이 남네. (名齊地久)
빙실은 무지개를 이루었고 (虹作室) / 백성은 오래동안 편안하리라(民永逸)
글로 다하지 못하니 (書未悉) / 돌에 새겨 기리노라(銘以刻)
좌수(座首) : 유학(幼學) 전숙(全璹), 양정화(楊鼎和)
도감(都監) : 진사 도이해(都爾諧), 유학, 최수징(崔壽徵), 서해(徐海), 이광전(李光全)
감관(監官) : 절충(折衝), 손정방(孫正邦)
사과(司果) : 배준성(裵俊成), 배상조(裵尙祚), 이진석(李震錫), 채두서(蔡斗瑞), 서윤달(徐允達)
도색(都色) : 홍치운(洪致雲)
색(色) : 김성중(金聲重), 서신업(徐信業), 김자중(金自中), 김천년(金天年)
도영승(都領僧) : 선원(善元)
도석수(都石手) : 임ㅇ립(林ㅇ立)
사령(使令) 이인백(李仁白), 안주민(安柱民)
1714년(숙종 40)
좌수(座首)는 조선 시대 향청의 우두머리를 말하는바 오늘날 대구시의 시정 자문위원장, 도감(都監)은 시민 대표, 감관(監官)은 현장에 파견된 감독 공무원, 사과(司果)는 공사에 동원된 군인, 도영승(都領僧)은 작업에 참여한 승려를 총괄하는 스님, 도석수(都石手)는 돌을 놓는 장인(匠人)의 책임자, 사령(使令)은 관아에서 파견된 연락 담당자로 추정되나 도색(都色), 색(色)은 무슨 일을 담당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면면을 보면 민, 관, 군은 물론 승려도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인적사항이 확인된 감독 진사 도이해(都爾諧, 1655~1715)는 본관이 성주로 1693년(숙종 19) 진사 시에 1등으로 합격한 사람으로 파악된다.
1730년 (영조 6)에 만든 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 내부 대구석빙고의 내부도 이랬을 것이다.
처음은 짚으로 덮은 초개빙고(草蓋氷庫)로 3년마다 1번씩 개수(改修)하는 데 주민을 동원해 피해가 컸었다. 이를 유 판관이 돌 즉 석개(石蓋)로 바꾸고, 관리비용도 감영이 보유한 영미(營米) 800석으로 충당하여 주민부담을 없애 민원이 없도록 하자 그 고마움을 남기기 위해 빗돌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판관(判官) 유명악(兪命岳)은 훌륭한 목민관이었다. 이외에도 유 판관을 기리는 송덕비가 이름은 영세불망비, 선정비 등으로 불리나 일설에는 대구의 34개면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세워졌다고 하며 현존하는 것만 해도 경북대학교에 석빙고 비를 포함 5기, 화원읍에 8기 다사읍에 1기 등 모두 14기가 있다.
훗날 아들 지수재(知守齋) 유척기(俞拓基, 1691~1767)도 1726, 5~1727, 6까지와 1737, 4~1738, 7까지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그 역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경상도 71개 군현(郡縣)에 각기 1기씩 세워졌다고 하며 대구에 현존하는 것만 경삼감영공원에 3기, 칠곡향교에 1기. 경대박물관에 1기, 다사읍에 1기를 비롯해 모두 6기가 있다
유(兪) 부자의 당파는 노론이었다. 특히, 유척기의 경우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경상도는 큰 고을이고 대구도호부는 경상도의 수읍(首邑)이다. 수많은 도백과 수령이 거쳐 갔는데도 유독 두 부자의 송덕비가 많은 까닭이 궁금하다. 재해 시에 어려운 백성을 구휼(救恤) 했거나 학문을 진작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볼 수 있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다.
본디부터 어진 사람이었던지, 성군 영조(英祖)의 탕평책을 받들어 남인에 대해 특별히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도시조 유삼재(兪三宰)가 신라 유신(遺臣)이자 득성지가 경상도 기계(杞溪, 포항시)라 본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의 발로인지 궁금하다.
대구 석빙고 빗돌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氷室之病民, 厥惟痼哉. 三歲一繕, 殫民財力, 思慾伐石用代塗茨, 而時詘擧贏, 莫就輿願矣. 幸我判官兪公諱命岳, 來莅未朞, 惠化克覃, 銳志革弊, 鳩財僝工, 築石爲場, 駕虹成屋. 凡九架而功訖, 始事於孟春之望, 完役於首夏之晦, 正所謂子來不日成之者也. 其間規畫之, 方施措之. 宜逈出常慮動中規矱, 方諸古昔未之曾有傳之 來裔賴無窮, 嗚呼, 休哉. 民其蘇矣. 初糶八百斛營米以資, 經用終焉. 自官備償不徵民戶, 其爲恩德, 欲報罔極, 不有顯刻, 何述偉績, 遂爲之銘. 銘曰. 斲彼雲根, 剗我巨瘼, 澤伴天弘, 名齊地久, 虹作室, 民永逸, 書來悉, 銘以刻.
座首, 幼學 全璹, 楊鼎和
都監, 進士 都爾諧, 幼學, 崔壽徵, 徐海, 李光全,
監官, 折衝, 孫正邦,
司果 裵俊成, 裵尙祚, 裵雲錫, 蔡斗瑞, 徐允達,
都色, 洪致雲,
色, 金聲重, 徐信業, 金自中, 金千年
都領僧, 善元
都石手, 林ㅇ立
使令, 李仁白, 安柱民
崇禎後 甲午 至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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