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음악가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서 이름을 따온 연장 230.8m의 아양교
팔공산의 능선과 대구의 용솟음 치는 기상을 형상화한 그린 게이트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제강점기의 아양교가 표시된 지도
유력 대구 명사들의 시회모임 아양음사의 회합장소 아양루
천재 예술가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의 전설이 깃든 아양교
대구는 낙동강이 서·남부를 금호강이 동·서를 감싸 흐르고, 신천이 시가지의 동서를 가르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역류하기 때문에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일부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의 이름이나 큰 건물에 따르고 있다. 사문진교, 팔달교, 강창교, 무태교, 수성교 등이 전자이고 경대교, 도청교 공항교 등이 후자이다.
반면에 이런 이름과 달리 역사성이나 아름다운 전설을 담은 이름이 있으니 대표적인 다리가 금호강 하류 다사읍의 방천리와 박곡리를 잇는 해랑교(海娘橋)와 동구 입석동과 효목동을 연결하는 아양교이다. 두 다리 모두 특별한 유래가 전해 오지만 우선 왕복 6차선인 아양교(연장, 230.8m. 폭, 35m, 높이 10m)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아양교(峨洋橋)의 높을 아(峨)를 자전에서는 “높다(구름 따위가 높이 떠 있다, 산이 높고 험한 모양)”, “재(높은 재)”, “위엄이 있다(위의가 당당하다)”, “산(아미산의 약칭)”으로 쓰이고, 바다 양(洋)은 “바다(大海, 外海)” “넘치다(가득 차서 넘치다)” “큰 물결(거센 파도)”, “외국(특히 서양)”,를 뜻한다.
그러나 두 글자를 조합한 아양(峨洋)이라는 고유나 보통명사는 없으며 아(峨) 자와 양(洋)자를 붙여서 해석해도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할 어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밝혀진 아양교의 유래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기원 400여 년 전 열어구(列禦寇)가 지은 중국 도가의 고전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의, <유백아전(兪伯牙傳)>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중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유백아(兪伯牙)는 성연자(成蓮子)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때로는 태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보여주었고 때로는 바다로 데리고 가서 거센 파도를 보여주면서, 바다와 비, 바람 소리도 듣게 했다.
백아는 이러한 스승의 엄격한 지도를 받아 비로소 대자연이 어울려 화합하는 신비하고 무궁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복잡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칠현금(七絃琴, 훗날 고구려에 도입되어 왕산악이 개량한 거문고의 전신)의 금곡(琴曲) 천풍조(天風操), 수선조(水仙操)라는 뛰어난 작품을 완성했다.
명성이 알려지면서 출세의 길도 열려 진나라에 가서는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런 일상은 음악가로서는 불행이며, 힘든 생활이었다. 20여 년을 진나라에서 보낸 그는 다시 고국 초나라에 돌아가 자신을 훌륭한 음악가로 이끌어 준 스승 성연자를 찾았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워하던 스승은 이미 저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 상심한 그는 강을 따라 배를 저어 갔다. 때마침 언덕에는 가랑잎이 지고, 강변에는 갈대꽃이 만발하여 고독한 나그네를 더욱 수심에 젖게 하였다. 강기슭에 배를 대고 뱃전에 걸터앉아 탄식하며 한 곡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스럽게도 그의 연주하는 소리에 맞추어 화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가을 저녁 적막한 강기슭에서 누가 그의 거문고를 들어 주었고 이해했단 말인가.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땔나무를 해 팔면서 사는 가난한 나무꾼 종자기(鍾子期)였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 아끼던 또 다른 한 곡을 연주했다. 이에 종자기는 뜻이 높은 산에 두고 있으면 훌륭하다. “우뚝 솟은 그 느낌이 태산 같구나. (峨峨兮若泰山.)”라 했고, 흐르는 물을 노래하면 멋있다.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바다와 같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다. 비록 서로 말은 하지 아니하였지만 백아가 연주하는 금곡(琴曲)의 의미를 종자기는 다 알아차렸다.
백아는 종자기가 이처럼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평가해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음 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때가 되어 백아는 종지기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병들어 죽고 없었다. 백아는 종지기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하면서 칼을 들어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칠현금의 줄을 끊어 버렸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오직 하나뿐인 그 사람이 세상 없는데 다시 연주하여 무엇 하느냐 하고 슬퍼했다.”
이 고사에서 “아아혜약태산(峨峨兮若泰山) 즉 우뚝 솟은 그 느낌이 태산 같구나.”와 “양양혜약강하(洋洋兮若江河) 즉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바다와 같다.”의 머리글자 즉 높을 “아(峨)” 자와 바다 “양(洋)”자를 따와서 아양교(峨洋橋)라고 지은 것 같다.
백아가 칠현금을 부수고 줄을 끊은 데서 “백아절현(伯牙絶絃)”이. 그리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막역한 친구를 뜻하는 “지음(知音)” “지음지우(知音之友)”가 고사가 유래했다.
아양교 부근의 아양루(峨洋樓)는 해방 후 경주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 1884~1970)을 비롯해 지역의 내노라하는 유지들의 시회(詩會) 모임인 아양음사(峨洋吟社)의 회원 31명의 회합 장소였고 또 아양아트센터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이다. 이들 역시 아양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필자는 아양이라는 격조 높고 고상한 이름이 시문에 능했던 아양음사 회원들에 의해 지어졌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아양교라는 이름이 일제강점기인 1915년(다른 자료에는 1932년도 준공)도 측량된 지도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단지 희망 사항이었을 뿐 사실이 아니어서 아쉬웠다. 따라서 아양교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런 고전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할 수 있었는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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