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 27 국보 제330호로 승격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현재 서울 소재 기상청에 있음)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투겁창 및 꺾창 (국보 제137-2호, 현재 서울 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부인사 초조대장경,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국보 제241호, 현재 경기도 소재 모 박물관 소장 )
대구의 자랑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보물 제842호)가 1985년 8월 9일 보물로 지정된 지 35년만인 2020, 2월 27일 문화재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국보(제330호)로 지정되었다. 이 측우대는 높이 46㎝, 너비 37㎝로, 1770년(영조 46) 청동제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오늘날 부산, 대구,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북도 행정을 총괄했던 경상감사의 집무실이었던 대구의 경상감영공원 선화당(宣化堂) 앞에 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 동작구 소재 기상청에 있고 측우기는 없어졌으며 받침이었던 대석(臺石)만 남아 있다.
앞면과 뒷면에 “측우대(測雨臺)”, 뒷면 왼쪽에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고 음각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6년(1770) 5월 1일 자에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 보고)하여 알리도록 하였다.”라는 기사와 제작연도가 부합되는 측우기임을 알 수 있다.
즉 영조가 세종조에 만든 측우기를 모방하여 창덕, 경희궁과 조선팔도, 양도(兩都?)를 포함 12기를 설치하도록 명령을 했던 그중의 하나가 경상감영 선화당 앞의 측우대이다. 그러나 영조의 애민사상의 산물이자 제작연대가 뚜렷하고 실록의 기록과도 일치된 측우기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조선고대관측기록보고, 1917』에는 “모두 7기(器)가 있었다. (그중 정상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는 모두 없어지고 대석(臺石)만 남아 있는 4기(基)가 있었다고 했으나, 현재는 경상감영 측우대 하나만 남아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국보로 승격된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제329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제330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보 제331호)”와 “관삼감 측우대 (보물 제843호)”, “통영 측우대( 보물 제1652호)” 등 측우기 1기와 측우대 4기가 남아 있었다. 다만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이번 국보로 승격된 1837년(헌종 3)의 공주 측우기, 1782년(정조 6)의 청덕궁 측우대보다 각각 67년, 12년 앞선 것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나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1907년 인천측후소장이었던 일본인 와다유지(花田雄次)에 의해서 보전될 수 있었다. 『대구의 설화, 박영규(朴英圭, 전 대구일보 사장)』에 의하면 구한말 대구는 친일 대구 군수 박중양에 의해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구읍성과 석빙고가 헐리게 되었다.
그 무렵 와다유지가 대구로 내려왔다. 그는 영국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대구의 측우기를 인천측후소로 가져갔고 어떤 연유인지 서울의 기상청으로 옮겨졌고 강수량을 계량하는 측우기마저 없어지며 이름도 “측우대”로 바뀌어 본향 경상감영 선화당 앞에는 모조품만 남아 시민의 무관심(?) 속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를 사적(私的)으로 소유하여 일본 기상청이 보유하고 있던 것을 중앙관상대장 양인기 박사의 노력으로 1973년 4월 돌려받았다고 한다.
특히 대구 측우대가 주목을 받은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한국과 중국 과학자들이 서울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였다. 그때 중국 과학자들은 측우대에 음각된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를 두고 당시 조선은 측우기를 만들 만큼 과학기술이 발달 되지 않아 청나라 황제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가 조선에 하사(下賜)한 것이라고 하여 우리나라 과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연호(年號) 건륭(乾隆)을 표기한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이에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영조 46년(1770)보다 328년 전 세종 24년 (1442)에 이미 측우기를 만들어 강수량을 측정했었고, 황제의 연호는 특별히 영조(英祖)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시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한 항복조건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라는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대구시민으로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특히, 대구의 역사성이나 도시의 규모(規模)에 비교해 문화재가 빈약한 것을 보충한 데서 더욱 그렇다. 다만 대구를 떠나 외지로 나가 있어 아쉽다.
대구측후소는 1907년 2월 1일 서문로 1가 78번지 중부경찰서 부근에 건립되었다가 1916년 적십자 병원 뒤 남산동 940번지로 이전했으며 1937년 동구 신암동 716-4번지를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동촌유원지 내 동구 효목동 1264-4번지로 처음 문을 연 112년 만인 2019년 부산, 대전, 강원, 제주, 광주에 이어 여섯 번째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승격되었다. 시세(市勢)나 관할 구역에 비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의 국보 승격을 보면서 대구시 문화재 정책도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구시는 “국가지정문화재 86점(국보 3, 보물 66, 천연기념물 2, 사적 8, 국가 민속문화재 5, 국가무형문화재 2), 시 자체문화재 114점(유형문화재 76, 무형문화재 17, 기념물 17, 민속문화재 4), 등록문화재 11점, 문화재자료 53점 등 모두 200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이들 문화재 중에서 3점의 국보는 대구시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미시 고아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으로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즉 대구시가 직접 관리하는 국보는 한 점도 없다. 반면에 이번 국보로 지정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 즉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 목판본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 249”(국보 제241호)를 비롯하여 20점의 초조대장경 관련 국보가 있고,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부속 (국보 제137-1호)”와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투겁창 및 꺾창(국보 제137-2호) 2점 등 대구시가 관리하지 않는 23점의 국보가 있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에 문화재가 많다는 것은 그 지역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이런 고귀한 문화재들이 당국과 시민의 무관심 속에 대구를 떠나 있다. 우선 목록이라도 작성하고 차후에 되돌려 받는 노력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모조품이라도 한군데 모아 시민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국보로 승격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에 관한 기사를 보며 더 간절해진다.
참고로 박영규 전 대구신문 사장『대구 설화』에서 대구 측우대와 한 세트인 측우기(測雨器)는 영국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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