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양잠산업(養蠶産業)의 선구자 서상돈(徐相敦)

이정웅 2020. 2. 25. 15:31


천주교 대구교구청 내 서상돈 상

북구 읍내동 칠곡향교 내 서상돈 송덕비


양잠산업(養蠶産業)의 선구자 서상돈(徐相敦)

 

 

서상돈(徐相敦, 1851~1913) 선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다. 2020년부터 대구시민의 날도 그가 주도하여 1907221일 북후정(北堠亭, 중구 시장북로 22-6)에서 열린 대구군민대회에서 일본의 경제예속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제공한 차관 1, 300만 원을 담배를 끊어 그 아낀 성금으로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한 날로 정했다.

따라서 다수 시민은 그를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지만, 이외에도 계산성당의 신축자금을 지원하고, 천주교 대구교구청의 부지를 제공한 독실한 천주교 신도이자, 40대에 대구 제일의 거상(巨商)이 된 실업가, 경상도 세정을 총괄하는 세무시찰관이었으며, 서당 해성재를 세운 교육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분야에도 우뚝한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양잠산업 발전에 초석을 놓은 지도자이자 직접 뽕밭을 조성한 양잠업자이기도 하다. 즉 당시 고소득작물인 뽕나무를 재배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양잠업(養蠶業)의 선구자였다.

지금은 오디를 따서 팔거나, 누에를 가공해서 만든 건강보조식품 정도로 활용되고, 명주도 일부 상류층의 고급 의류 소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인 사양산업(?)으로 전락했지만 60~70년대까지는 고치 생산으로 자식들 대학 보내고 논밭을 사는 효자 작물이었다.

서상돈 선생은 피폐한 농촌을 보며 양장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1902년 대구전보국 조중운 사장과 함께 경상북도 칠곡군 문주면(, 대구시 북구 사수, 금호, 팔달, 매천동 일대)21천 그루의 대단위 뽕나무밭을 조성(천둥소리, 2017, 여름호)했을 뿐 아니라. 1904년 당시 잠업이 성행했던 일본의 장야현(長野縣군마현(群馬縣)에서 공부하고 온 이종국(李鐘國, 훗날 영일 군수역임)대구잠업전습소(大邱蠶業傳習所)”를 설립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잠업지도자 양성 기관이다.

그 후 초대 소장 이종국이 관계(官界)로 진출하자 둘째 아들 서병조(徐丙朝)2대 소장이 되었다. 1911년 경상북도 잠업전습소가 설립되면서 모든 업무를 인계해 줄 때까지 7년간 운영했다. (대구부사 大邱府史’ 1943)이후 대구의 잠사(蠶絲産業)은 전국에서 최고로 발전했다.

옛 문주면 소재지였던 금호동에 거주하는 김정립(74)에 의하면 일대에 고소득 양잠 농가가 많아 한 마을의 대학생이 칠곡군 전체 대학생보다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헌법학자 김철수(金哲洙) 박사(서울대학교 명예 교수)의 조부도 누에를 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상돈 선생이 부지를 제공한 천주교 대구교구청의 드망즈(우리말 이름 안세화) 초대 주교는 사목(司牧) 이외에 보육원을 운영했는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수녀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목화를 심어 물레로 씨를 뽑아 베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뽕나무 재배는 서상돈 선생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주면과 가까운 북구 읍내동(북구 칠곡중앙대로 597) 칠곡향교 경내에는 1912년 돌아가시기 1년 전 주민이 세운 서상돈 선생 송덕비가 있다. 2013년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 필자가 발견하여 매일신문을 통해 발표되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어질고 착한 이를 내리시니 천강인선(天降人善)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네. 구령만민(救靈萬民)

곳간(창고)을 열어 혜택을 베풀어 손름시혜((損廩施惠)

곤궁한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셨네. 주궁휼빈 (賙窮恤貧)

일찍이 농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고 조성경가(早誠耕稼 )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었네. 평균관수(平均款收)

그 공덕을 조각 돌에 새기니 기공편석(記功片石)

천추 만년 빛이 나리라. 생색천추(生色千秋)

 

비록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 빗돌 역시 문주면에 조성한 뽕나무밭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읍내동 등 현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주가 달성서씨로 알려진 사람이 팔거들에 약 100두락의 농토를 영세농가에 소작(小作)주고 있었는데 이 지주가 바로 서상돈 선생(본관, 대구)으로 보인다. 비문 여섯 번째 연() 평균관수(平均款收)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었네.”라는 표현은 세무 공무원(시찰사)으로 조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데도 공평했음은 물론 소작료 거두기도 풍흉에 맞게 했다는 뜻 같다.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취지서를 낭독한 북후정 위치를 두고 지금까지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라고 비정하였으나 최근 () 시간과 공간연구소 김주야 대표가 중구 시장북로 22-6번지<대구문화 2월호>로 발표했다. 따라서 역사적인 이 공간을 바로 잡아 자랑스러운 현장답게 꾸밀 필요가 있으며 대구상공회의소가 만든 기념 조형물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