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화가 이중섭과 대구
들어가는 말
국민화가 또는 천재 화가로 불리는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그는 당시로서는 어려웠던 일본 유학을 마친 엘리트이다.
그는 오히려 해방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북쪽에서는 사상이, 남쪽에서는 가난이 족쇄가 되어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작고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다 자유로은 땅을 찾아 남하했다. 낯선 땅 부산에서 부인과 두 아들을 건사하기 위해 막노동으로 전전해야 했으며 거처마저도 안정되지 않아 서귀포, 통영, 진주, 서울등지로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이런 역경 속에서도 다소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으나 그림으로는 생계를 잇기조차 힘들었고, 호의호식 한번 못해보았다. 하지만 사후 국내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는가 하면 고가로 거래되어 소장자들의 배를 불리게 하였다.
우리 대구는 통영, 서울에 이어 그의 3번째 개인전이 열렸던 곳이자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낙원의 가족들”, “신문을 보는 사람들” 3점의 은지화가 미국 공보원장 맥타가트(Mctaggart)에 의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행운(?)을 누린 곳이자 원산에서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구상(具常, 1919~2004)이 전시회를 후원하였음은 물론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던 그를 소설가 최태응과 함께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던 곳이다. 또한 그의 짧은 대구 체류(滯留)는 장석수, 강우문, 서석규, 정점식 등 지역 화가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대구 생활이 어떻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매우 단편적이고 소략하다. 이글은 미술에는 문외한인 필자가 대구의 자랑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차원에서 최열의 『이중섭 평전, 2014』, 조향래의 『향촌동 소야곡, 2007』, 최석태의 『황소의 혼을 사로잡는 이중섭, 2001』, 강원희의 『천재 화가 이중섭과 아이들, 1999』 구상의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2002』, 나건식, 황석모, 오성현 3인의 『맥타가트 박사』 등을 참고하여 시차별로, 장소별로 재구성해 보고자 만용을 부려 본 소설같은 글이다. 훗날 전문 연구자에 의해 보다 자세히 정리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중섭의 내구(來邱)와 개인전
이중섭은 1955년 2월 24일 구상의 권유로 대구에 내려왔다. 그해 1월 18일부터 1월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에서 팔고 남은 30여 점을 가지고 구상과 포병대령 이기련, 이중섭 셋이서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서울 전시회는 시민들의 높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예약을 해 두었던 사람이 작품을 가져가지 않거나 설령 가져갔다 하더라도 돈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대구행에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하루빨리 전시회를 열어 끝나면 바로 상경하여 미처 수금하지 못한 그림값을 받을 생각이었다.
구상(具常)은 이중섭이 내려오기 전 같은 신문사 문화부 김요섭기자에게 거처를 마련하라고 했다. 이에 중학교 한 여교사 집의 빈방을 얻어 두었는데 갑자기 그 여교사가 “소문을 들으니 방을 쓸 사람이 전쟁 노이로제증 환자”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부랴부랴 얻은 곳이 대구역 앞 경복여관 2층 9호실로 이후 이곳은 이중섭의 활동 거점이 되었다. 3월 4일자, 20일자, 4, 17일자로 매일신문이 주문한 삽화를 그렸고 또한 3월 27일자 기사 “이중섭 화백 소의 묵종(默從)”에서는 “몇몇이 가끔 술집으로 유인하는 외에는 여관방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고 지적하면서 “음산한 날씨와 같이 침통한 그의 표정” “곧잘 소를 그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민족적 숙명에의 따뜻한 빛이 얼키어 반항정신이 어울려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함께 유숙하던 소설가 최태응이 그의 소 그림 한 점을 가지고 미국공보원장 맥타가트를 만나 대관 승낙을 받았다. 다음날 맥타가트의 요청으로 이중섭과 함께 백마다방(白馬茶房)에서 만났다. 이때 맥타가트는 이중섭의 소에 대하여 “꼭 스페인의 투우와 같이 무섭군요”라고 했다. 이에 이중섭은 “뭐라고요? 투우라구? 내가 그린 소는 그런 싸우는 소가 아니고 착하고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 한국 소란 말이우다.” 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가 묵고 있던 경복여관으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보고 그리고 보고 그린 소를 스페인 투우에 비교하다니 내 그림이 그렇게 보이면 나는 다 틀렸어”라고 밤새 울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영남일보가 주최하는 <이중섭개인전> 날짜가 잡혔다. 맥타가트의 특별한 배려라고 한다. 1955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6일간이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던 김광림, 구상, 육군 대령 이기련이 이중섭의 부탁으로 성냥개비에 잉크를 찍어 서투른 글씨를 더 서툴게 하여 그로테스크하게 그림 제목을 붙이는 등 전시회를 준비했다.
자화상
1948년 문을 연 미국공보원은 1952년 6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북한지부 주최 월남화가작품전을 시작으로 9월 이상범 개인전, 12월 공군작품전, 1953년 육군창설기념시화전 및 6·25기념종군화가단을 작품전을 연 뒤 휴관상태였다.이런데도 이중섭 개인인전이 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이중섭이 대구로 내려오기전 맥타가트는 동아일보에 이중섭 작품은 “수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론을 한 것을 보면 화가 이중섭에 대한 맥타가트의 지지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자화상(이중섭, 1955)
‘봄’, ‘아동’, ‘새벽’, ‘달밤’, ‘길떠나는 가족’, ‘닭’, ‘달밤B’, ‘고기잡이’, ‘그림조각’, ‘무제A’, ‘피난민의 첫눈’, ‘바닷가’, ‘실제(失題)’, ‘두 마리 소’, ‘소(素)’, ‘무제’, ‘동(童)’, ‘옛 이야기’, ‘씨름하는 소’, ‘제주도’, ‘동심’, ‘무제C’, ‘씨름하는 소B’, ‘왜관풍경A’, ‘왜관풍경B’, ‘이조때 초롱’ 등 안내장에 표기된 26점과 대구에서 그린 10점 기타 서울에서 가져온 작품 20점을 모두 56점을 출품했다. 전시회 준비를 위해 물감은 물론 계성학교에 작업실은 마련해 주고 안내장을 만든 정점식 화가의 축사는 다음과 같다.
“중섭씨의 세계는 양화를 동양에로 이식하는 과정의 ‘포인트’로서 Persia적인 극히 적응한 자세에서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임자 없는 규방의 문을 들여다보는 신비로운 진기(珍奇)와 구둘목의 훈기를 품고 있으며 그의 내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양적인 소란한 정적(靜寂)의 세계에로 이끄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나라 고공예품(古工藝品)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씨의 평소 태도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씨는 일찍이 일본의 유력한 전위미술단체인 신제작협회에서 그 이채를 발휘하였으며 또한 우리나라 재야 화단의 중진으로서의 존재는 다언을 필요치 않는다.
이 작품전이 동호지우(同好知友)들의 노력에 의해 대구시민들 앞에 개진된 것을 다행으로 알며 감사하는 바이다”
이중섭의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영남일보 김요섭 기자는 붓과 벼루 등 전시장에 필요한 물품을 밤늦게까지 준비하는 한편, 음악감상실 녹향에 있던 문학지망생을 불러내 그림을 벽에 걸게 했다. 구상의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에 의하면 전시 기간 중 어떤 사람이 그림에 빨간 딱지를 붙이게 되면 친구들에게 귓속말로 “잘해, 잘해, 또 한 사람 업어넴겼어 (속였어)” 하고, 상대방에게 가서는 아주 정중하게 “이거 아직 공부가 덜된 것입니다. 앞으로 진짜 좋은 작품을 만들어 선생님이 지금 가지신 것과 꼭 바꿔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구상은 “결과적으로 부도(?)가 났지만, 이것은 그의 빈말이 아니라, 자기의 현재 작품에 대한 불만과 함께 장래 할 대성(大成)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 했다. 전시기간 중 이중섭은 가톨릭신자가 되려고도 했다. 4월 14일 구상에게 이런 내용에 편지를 보냈다.
구형(具兄) 그새 알마나 바쁘셨습느까 제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는 하나님을 믿을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교회에 나가 제의 모든 잘 못을 씻고 예수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경을 구해 매일 읽고 싶습니다. 명일 15일 오후 4시경에 사(社 =영남일보사)로 찾아 뵙겠으니 지도하여 주십시오. 제(第)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 생이고, 구상은 1919년생으로 이중섭이 구상보다 3살 위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존칭을 썼다. 그러나 전시회는 서울에서와 같이 실패로 끝났다. 출품작 반 정도가 팔렸다고 한다. 실망한 이중섭은 남은 작품을 경복여관 아궁이에 태우거나 우물 속에 처넣어버리기도 했는데 이를 발견한 최태응이 애인의 친구 순자(順子)와 같이 달래거나 두레박에 소쿠리를 달아 건져 올렸다고 한다. 일부 은지화 그림은 구상이 그가 근무하든 영남일보사의 사무실에 보관했는데 잃어 버리기고 나머지는 김요섭에게 맡겨 훗날 김이석과 한묵에게 전해졌으나 그때는 이미 이중섭이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중섭의 지친 모습을 본 한 아주머니가 닭을 고아주었는데 전시회가 끝난 후 그 분에게 감사의 뜻으로 3점을 주어 훗날 그 분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특이할 점은 맥타가트가 “싸우는 소” “환희” 2점을 구입하여 훗날 그림 판매 대금이 영남대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이 되고, 이중섭이 기증한 은박지 그림 3점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행운 주어졌다.
그러나 맥타가트가 사는 것을 이중섭이 거부했기 때문에 최태응을 통해 몰래 구입 했다는 설도 있다.
이중섭·최태응과 태전동
대표작 흰소
이중섭은 전시회가 끝난 후 곧바로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와 같이 외상으로 가져간 그림값을 수금해야 했고, 또 기대와 달리 시민의 반응이 저조해 심신이 고달팠다. 향촌동의 백록다방에서 은박지로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거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서 무료함을 달래거나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으며 때로는 왜관의 구상 집과 태전동의 최태응 집을 찾아 몸을 추슬렀다.
왜관은 구상의 아내 서영옥이 순심병원을 개원하여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이고, 태전동은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 여사가 매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관에서의 활동은 “왜관 성당 부근” “구상 네 가족 2점,” “낙동강 풍경” “자기네(이중섭) 가족 풍경” 등 5점의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 있는 데 비해 태전동에서는 특정할 만한 그림도 확인되지 아니하고, 마을 이름도 잘 못 알려져 있다.
서규수(대구시 중국어문화해설사)의 그간 연구실적과 배석운(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도성탁(대구보건대 교수), 필자 등이 최태응의 맏아들 최수철의 학적부(매천초등학교)를 살펴보고 현장을 확인 한 바에 의하면 이중섭이 잠시나마 머물렀던 최태응이 살던 곳은 처음은 북구 학정로 82-52(태전동 459-5. 현, 숲속나라어린이집)이고, 두 번째 집은 같은 학정로 102(태전동 571. 현, 안호기씨의 댁이었다. 이중섭은 두 번째집에서 기거했다.
최태응의 아들 최수철은 1951년 9월 7일 부산남부국민학교에서 매천국민학교로 전학해 1955년 3월 21일 제1회로 졸업했다. 따라서 최태응도 아들 전학과 비슷한 시기에 태전동(太田洞)으로 이사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밤이면 이중섭은 부인과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해 최태응 부부는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그러나 태전동 거주도 잠시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선생이 1956년 급성복막염으로 죽자 학교 부근 야산에 매장하고 이후 서울로 이사함으로 끝나고 말았다.
2016년 조선일보(7월 4일)는 미국에 거주하는 최태응의 차녀 은철씨가 부친의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이중섭의 미공개 자작시 6점과 그림 3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이 신문사와 인터뷰에서 이중섭의 태전동시절에 대해 “아침마다 시골길을 산보(散步) 갔다가 돌아오면 늘 저를 업어주었던 아저씨(이중섭)의 넓고 편안했던 등이며 우리 아버지(최태응)가 사다 준 그림물감을 가지고 동네 연못가에서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 등이 제겐 모두 소중한 추억”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자료는 태전동 시절 이중섭은 소 그림 한 점을 매천초등학교에 주었다고도 했다.
이외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길에 버려진 쇠똥을 치우고 밭에 묻고 했다. 그랬기에 그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다 중섭을 너무 잘 안다.” 했고 “소를 사랑했던 이중섭은 시골의 소에 눈길을 주었고 그래서 작품 소를 그려 국민학교에 주었다.” 고 했다.
이런 정황들을 보면 소 그림 한 점과 그가 대구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우리 안에 든 청조(파랑새)” “병든 새” “열리지 않는 창” “거꾸로 서 있는 동자상” “달과 해“ 중에서 ”우리 안에 든 청조“는 태전동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고 더불어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한 미발표작 3점을 포함하면 5점 정도는 태전동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의 석사학위 논문을 쓴 조정자는 “우리 안에 든 청조(파랑새)”에 대해. ‘우리 안에 같혀 있는 청조(파랑새)는 이중섭 자신을 표현하고, 복숭아꽃도 가지가 꺾여 있는 것을 보면 절망스러운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해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그 얼마 후 이중섭은 정신이상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즉 서울에 이어 대구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전시회,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외로움, 불투명한 장래, 자신을 옥죄는 가난 등 이중섭 자신의 불행한 모습을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태전동에서 그려졌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일대에는 복숭아밭이 있어 그림 속의 가지가 꺾인 복숭아꽃은 일대의 복숭아밭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외도 이중섭의 그림 중에는 “사과 따는 남자” 등 사과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들 역시 태전동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잠깐씩 머물렀던 서울, 제주, 통영 등에는 사과가 널리 재배되지 아니하였던 반면에 대구의 태전동 일대는 복숭아, 사과재배가 활발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태전동은 그때와 달리 상전벽해로 변했다. 복숭아밭도 없어지고 최태응과 이중섭이 함께 살던 집도 헐리고 새로 지워졌으며, 그림을 그리던 연못은 고층 아파트가 되었다. 그러나 옛 모습이 다소 남아있는 골목에는 어쩌면 그의 자취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 국민화가 이중섭과 한국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 최태응을 다시 대구로 불러왔으면 한다.
특히, 이번 기회에 이중섭의 칠곡 매천동 거주를 대구시 북구 태전동이라는 것도 바로 잡아야 한다. 매천동이라고 알려진 것은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 선생이 매천국민학교 교사였던 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대구에서 이중섭을 말하면 최태응이 따라붙는다. 두 분이 이북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는 황해도, ‘이’는 평안남도로 고향이 각기 다르고, ‘최’는 소설가이며, ‘이’는 화가로 장르도 다르다. 그런데도 ‘이’와 ‘최’가 같이 경복여관에서 묵었을 뿐 아니라, ‘이’가 ‘최’에게 정신이상 증상에 특효약이라며 해골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막역한 사이이고, 1남 3녀가 세 들어 사는 태전동까지 불러 물감까지 지원해 주고, 입원한 이중섭의 간병(看病)은 물론 입원비까지 부담한 호의를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다. 이중섭이 한 때 부산 범일동에서 피란살이를 할 때 이웃에 살며 쌓은 친분 때문일까? 아니면 경복여관에서 합숙하다시피한 최태응의 남다른 친화력일까 상상해 볼 뿐이다.
최태응(1916~1998)은 이중섭과 동갑으로 황해도 은율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일본 니혼대학을 졸업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의 지도로 24세에 “바보용칠이” 등을 『문장』에 발표하여 데뷔했다. 그는 피란지 대구에서 매일신문에 장편소설 <낭만의 조각>을 연재하기도 했다. 친구와 술을 좋아해 고료를 받으면 백록다방 등을 전전하다가 술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에게 소설수업을 받은 대구 출신의 소설가 윤장근은 “유순한 데다 정이 많다 보니 따르는 여인도 많았다. 대구에서도 몇 사람의 여인이 그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상하게 최태응은 모성애 같은 여성의 본성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평을 했다. 가정을 뒷전으로 하며 친구와 술 마시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동촌유원지”, 어떤 자료에는 1954년 작이라고도 하나 이중섭이 대구에 온 것은 1955년이다.
최태응의 대구 출현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의 또 다른 제자로 미국에 거주하던 최태응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임도순(대구여성문학회 초대회장 역임)씨에게 최태응·이중섭 두 사람에 관한 일화를 듣기 위해 전화를 시도했으나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 얼마 후 작고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중섭의 발병과 입원·상경
이중섭은 전시회가 끝난 4월 하순부터 6월 하순까지는 비교적 자유스럽게 생활했던 것 같다. 왜관과 태전동을 오간 것은 이때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주 거주지는 역시 경복여관이었다. 여관비를 못 낸 미안한 마음에 청소를 하거나 손님들 신발을 닦아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구상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큰 복숭아 속에 한 동자(童子)가 청개구리와 노니는 그림을 가져와 불쑥 내밀었다. 어쩌란 것이냐 하고 물었더니 “그거 왜 있잖아 무슨 병이 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먹고 얼른 나으라”고 하며 겸연쩍어 하드라는 것이다. 구상은 그때 이중섭의 표정이 순하디 순하게 보였다고 한다. 사실풍의 그림 “자화상”을 그려 보여 주기도 했다.
구상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중섭과도 잘 어울렸던 포병 대령 이기련이 취중에 “너는 빨갱이다.”라고 놀렸더니 경찰서를 찾아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구상의 친구라고 해 대구경찰서 사찰과장이 구상이 근무하던 영남일보에 전화를 걸어 급히 데리고 나와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이때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일 될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저렇듯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동경에 그림 그리려 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남덕(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의 한국 이름)이와 애들이 보고싶어 그랬지”라며 이상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구상은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에서 “일체 음식을 거절하였고 병원에 드러누웠다가도 외부에서 자동차나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면 벌떡 일어나서 비를 들고 2층부터 아래층 변소에 이르기까지 쓸고, 걸레로 닦고, 어떤 때는 밖에 나가 길에 노는 아이들을 끌고 와서는 세면장에서 신발과 얼굴을 씻어 주며 이제부터는 자기도 세상에 봉사를 좀 해 봐야되겠다는 것이으며, 동경(東京)행 계획은 처자에게 향한 개인적인 욕망이었으며 그때까지 한주일도 거르지 않던 가족과의 교신을 단절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연달아온 서한을 아무리 전해 주어도 개봉을 않고 나에게 돌려주며 반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고 술회했다.
이어 음식 거부 증세에 대해 “평안남도 평원군 부농의 막내로 태어나 풍족하게 살며 늘 배풀 던 그가 남의 신세, 남의 덕, 남의 호의에 기대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하고, 현실의 불행을 남에게 돌리고 세상이나 사회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능과 무력과 불성실로 돌리고 자책하는 것이며, 무서운 자학이요 무서운 도전이며 그림으로 세상이 먹여주지 않으니 안 먹겠다고 것이요, 그림이 소용없으니 안 그린다는 것이며, 이를 결행한 그에게는 정연한 이로(理路)와 완강한 자기 진실이었고, 또 외 길 밖에 없는 선택” 이라고도 했다.
태전동에서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안안에 갇혀있는 청조(파랑새)
또한, 구상은 “중섭은 쾌쾌히 말해 천재로서 순수한 시심과 황소같은 화력(畵力)을 지녔을 뿐 아니라 용출하는 사랑의 소유자였다. 나는 문외한이라 그의 작품이나 작기(作技) 진가는 감히 언급을 피하지만 그처럼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예술가를 내 시대에는 모른다.”고 했다.
이중섭에 대한 여러 자료를 보면서 지금까지 연구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의 『대구신택리지, 권상구』에 “이중섭이 개인전 결과가 만족하지 아니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자 대구정신병원장 소규영이 2층 서재를 내주며 그림그리기와 치료를 병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일주일 지내다가 뛰쳐나가면서 은지화 40여 점을 소규영에게 주었으나 소 원장이 되돌려 주었다”라는 것이다.
1955년 8월 25일 이종사촌 이광석과 친구 김이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간 이중섭을 돌보던 최태응은 부인이 복막염으로 앓아누워 더 이상 간병을 할 수 없어 연락했기 때문이다. 최태응과 구상이 병원비를 지불했다. 다음날 8월 26일 대구역 앞에서 아침을 짜장면으로 대신하고 오전 9시 기차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2월 24일 큰 기대를 가지고 대구에 내려왔으나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몸만 상한 채 떠났다. 만 6개월 만이다.
수도육군병원과 성베드루 신경정신과병원, 청량리뇌병원을 전전하다가 구상에 의해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56년 9월 6일 정오쯤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없이 홀로 영면했다. 한창 일할 40세였다.
이중섭 장학생
이중섭은 우리나라 미술사에도 큰 족적(足跡)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은 대구의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중섭에게 대구 미국공보원을 대관해 준 원장 맥타가트(1915~2003)는 미국 인디아나주에서 출생했다.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스텐포드대학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1948년 미 국무성 직원으로 이태리, 폴란드 등을 거쳐 1953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주한 미국 국무성 재무관으로 있으며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등에서 미국문학, 미술평론 등을 강의 했다.
1956년 대구 미국공보원 원장을 맡아 부산에서 와 같이 경북대, 대구대, 청구대 등에서 강의 했다. 이후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하고 교육 발전에 끼친 공로로 1569년에는 명예 대구시민증을, 이듬해 경북대핵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북부 미국문화원에서 근무하다가 베트남으로 전근하여 주 베트남 미국문화원장을 마지막으로 1975년 정년퇴임했다.
잠시 고국에 돌아가 있던 중 영남대학교가 영어영문학 교수로 초빙하여 1976년부터 1997년까지 21년 동안 재직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유난히 사랑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특히, 늘 검소하여 정장은 단 두 벌을 번갈아 입고, 구두는 닳으면 수선해 신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영남대 재임 중 “우정장학회”를 조직하여 총 3백 30여 명의 학생에게 2억 6천여만 원의 장학금을 주었다. 이 장학금은 그가 이중섭으로부터 구입한 “싸우는 소”와 “환희” 두 점의 그림을 판매해서 만든 종자 돈이 바탕이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중섭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지만 그의 그림으로 인해 수많은 영재가 양성되는 또 다른 영역에 기여했으며 그들이 사회 각 분야의 교수 등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다.
맥타가트는 장학회를 만든 것뿐만 아니라, 수집했던 문화재 4백 80여 점을 국립 대구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1985년 '문교부장관상', 1992년 ‘월남 이상재상'에 이어 1998년 ‘자랑스런 영대인상’을 수상하했다.
그는 이중섭이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본 서양인이다. 그는 이중섭으로부터 구입 한 은지화 세 점을 ‘모마(MoM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929년 근대 예술을 미국에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모마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이중섭의 은지화를 “예술성뿐 아니라 소재 사용과 작가의 창의성으로 봐서도 실로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중섭이 맥타가트로 인해 그의 작품이 최초로 서양에 알려지는 영광(?)을 누렸지만 맥타가트는 이중섭으로 인해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행운을 가졌다. 서로 윈 윈했다.
맥타가트에 의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 된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이중섭은 이외 왜관 순심중고등학교 장학기금조성에도 일익을 했다. 이무(전 순심중고등학교 교장)에 의하면 어느 날 학교 서고를 정리하다가 한 점의 그림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른 쓰레기와 같이 버리려고 하다가 누군가 놔두어보자고 하여 별도 보관했던 것이 이중섭의 그림이었다. 그는 이 그림이 학교에 보관된 것에 대해 구상 집에 머물 때 이 학교에 와서 잠시나마 학생들에게 미술을 지도했다는 풍문이 있다고 했다.
이중섭은 구상이 원산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할 때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미술수업을 했다고 한다. 또 그의 수작으로 꼽히는 “왜관 성당 부근” 역시 순심학교에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림이 외부에 알려지자 모 미술관이 억 대에 사가고 학교는 이 돈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해마다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그림을 팔기 전 대구에서는 칼러 복사기가 없어 대전까지 가서 4부를 복사 현재 그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낙동강 풍경”이다.
맺는말
앞서 말했듯이 이중섭의 대구 체류를 시차별로, 지역별로 정리해 보고자 했으나 참고로 삼은 여러저작들도 각기 상이하여 나름대로 첨삭 정리해 본 것 이지만 최열의 『이중섭 평전』을 모본으로 했다.
연구자들의 주장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 점은 첫째 맥타가트의 미국공보원장 취임이 1956년이라는 설과 1955년이라는 설이 서로 대립하고 둘째 대구의 명소 동촌유원지 여름풍경을 그린 “동촌풍경”을 1954년 작품이라고 하나 1955년에 3월 24일 대구에 온 사실과 일치하지 아니하며 셋째 개인전을 마치고 근교의 구상이 사는 왜관과 최태응이 사는 매천동 중 왜관은 맞지만 칠곡 매천동은 북구 태전동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넷쩨 거리문화시민연대의 『대구신택리지』에서 소개한 “정신이상증세가 나타나자 2층 서재를 제공하고 치료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할 수 있게 제안한 대구정신병원장은 소규영 이야기는 처음 밝혀진 바 사실여부의 확인이 필요하다.
다섯째 이중섭이 한달여 입원한 병원을 많은 연구자들이 성가병원이라 했는데 『대구신택리지』는 성묘병원이라 하여 혼란스러운 점도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중섭의 대구 생활을 1955년 3월 24일에 내려와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4월 중순부터 7월 입원하기 전까지 왜관과 태전동을 왕래했으며 7월 언제부터인지 한 달가량 입원했고 8월 26일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같다. 정확히 6개월 동안 체류했다. 만약 입원 기간 한 달여를 제외하면 실제 대구에서 활동한 기간은 5개월에 불과하다.
이중섭의 많은 작품 중 연구자들이 대구에서 그린 것으로 지목한 그림은 “대구 눈과 새의 여인” “대구 새와 여인” “대구 물고기와 가족” “춤추는 가족” “사계(四季)2” “애들과 게와 물고기” “손” “우리 안에 든 청조” “병든 새” “열리지 않는 창” “거꾸로 서 있는 동자상” “달과 해골” “동촌풍경” “자화상” 등 14점 정도 알려져 있고, 맥타가트가 구입한 2점은 “싸우는 소” “ 환희”이며,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은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낙원의 가족들”, “신문을 보는 사람들” 3점의 은지화이다. 또 왜관에서 그린 것은 “왜관 성당 부근” “구상 네 가족 2점,” “낙동강 풍경” “자기네(이중섭) 가족 풍경” 등 5점이다. 특히, “우리 안에 든 청조”와 “사과 따는 남자” 등은 매천동에서 그리거나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우리 대구는 이중섭에게 있어서 “생애 3번째 개인전이 열린 곳”이자 그의 작품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최초로 서양에 일려지게 된 곳”이다. 반면에 문화예술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의 브랜드 가치도 그에 의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 일년 남짓 살던 서귀포처럼 독립미술관을 짓지 않는다 하드라도 대구미술관 등이 특별전을 여는 등 국민화가 이중섭이라는 귀중한 문화자산을 활용하여 대구시민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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