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국립신암선열공원의 추억
독립지사 단일 묘역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52위 (서훈자 48위, 미서훈자 4위)의 영령이 모셔진 곳이자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유일하게 조성 관리해왔던 신암선열공원이 2018년 5월 1일 국립신암선열공원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남구 대명동 시립공동묘지에 산재했던 애국선열의 묘 5위를 현 위치로 이전함으로 비롯되었다.
1974년 경상북도에서 대구시로 관리 주체가 바뀌었고 1982년 대구시가 “선열묘지설치 및 관리조례”를 제정했으며 1987년 묘역 성역화 사업을 실시했다.
이곳에 잠들고 계시는 분들은 일제의 폭압과 탄압에 결연히 항거하며 민족의 자주정신을 지키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헌신하신 분들로 훈격별로는 독립장 1, 애국장 11, 애족장 32, 대통령 표창 4분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국립신암선열공원 승격을 기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69년에 9급으로 공직에 발을 들어 놓은 지 20년만인 1988년 사무관 승진과 함께 산림계장에 보임 되었다. 하는 일이 주로 도벌(盜伐)이나 산불로부터 산림을 보호하고 조림(造林)을 하는 일이나 지금과 달리 산림청 소유의 국유림도 관리했다.
하루는 사무실로 찾아온 사회과(社會課) 보훈 업무담당자에게 동료직원이 몹시 흥분한 얼굴로 닦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신암선열공원부지가 산림청 소유국유림인데 점용료를 납부하지 않아 매년 지적을 받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다고 했다.
“그러냐”고 그냥 넘겼지만 언뜻 이는 뭔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분들에 대한 현창(顯彰)과 예우는 국가가 앞장서야 할 일이고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을 지방자치단체가 하고 있다면 표창을 주어야 마땅할 터인데 묘역을 관리하는 대구시에 점용료까지 부담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몇 차례 산림청에 면제해 줄 것을 건의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불가(不可)였다. 마침내 점용료부과 근거가 되는 “국유림관리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법조문을 검토해 보니 도로나, 구거(溝渠,폭이 좁고 적은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등 불특정 다수가 공공(公共)의 목적으로 점용하는 경우에는 면제 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도로, 구거 다음에 “선열묘지”를 추가하는 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역시 불가였다. 국유림을 선열묘지료 점용한 경우는 전국 어느 시도에도 없는 대구만의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대구만을 위해 법을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산림청 국유림 담당자가 국유림의 관리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출장을 왔다. 서류 심사와 현장확인을 마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대구에서 하루 묵고가기를 청했다. 저녁을 대접을 후하게 하고 여관을 잡아 주는 등 정성을 다해 예우하자 마침내 방안이라며 점용허가를 대구시장이 하지 말고 보훈처장이 직접 산림청장에게 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부의 어느 부처이든 중앙정부가 필요에 의해 점용허가를 받으면 면제된다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허가를 대구시장, 보훈처장 누가 받든 선열의 묘소를 유지 관리하는 데는 하등 문제가 될 수 없는 데 비해 대구시가 부담해오던 점용료를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장자 명단 및 훈격(자료, 2019, 1 광복회 대구지부)
번호 | 성명 | 생몰연도 | 훈격 | 운동계열 | 출신지 | 비고 |
01 | 임용상(林龍相) | 1877, 5~1958, 1 | 독립장 (1977) | 의병 | 경북 청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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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김용해(金湧海) | ? ~1919, 3 | 애국장 (1968) | 3. 1운동 | 대구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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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김세용(金世用) | 1906, 9~1996, 7 | 애국장 (1990) | 광복군 | 평북 용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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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방한상(方漢相) | 1900,8~1970, 1 | 애국장 (1963) | 국내 항일 (기관파괴) | 경남 함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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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신재모(申宰模) | 1885, 4~1958, 6 | 애국장 (1968) | 국내 항일 | 경북 칠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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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송두환(宋斗煥) | 1892, 11~1969, 5 | 애국장 (1977) | 군자금 모집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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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백영촌(白永村) 이명, 백남신 | 1882, 10~1964, 10 | 애국장 (1977) | 군자금 모집 | 경북 영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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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안윤재(安允在) | 1877, 11~1944, 2 | 애국장 (1977) | 105사건 | 황해 송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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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배학보(裵鶴甫) | 1920, 8~1992, 10 | 애국장 (1968) | 대구사범 학생운동 | 경북 성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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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박만선(朴晩善) | 1924, 3~1999, 2 | 애국장 (1990) | 국내 항일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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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김명천(金明天) | 1916, 9~1999, 2 | 애국장 (1968) | 광복군 | 함북 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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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김태련(金兌鍊) | 1879, 1, 25~1943, 8 | 애족장 (1968) | 3.1 운동 | 대구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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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박낙현(朴洛鉉) | 1887, 8~1957, 4 | 애족장 (1982) | 3,1 운동 | 경북 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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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김충한(金忠漢) | 1883, 10~1965, 12 | 애족장 (1985) | 3,1 운동 | 경북 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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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이봉로(李鳳魯) | 1902, 7~1986, 2 | 애족장 (1968) | 제2경북 유림단 | 대구 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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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박재헌(朴在憲) | 1900, 1~1986, 2 | 애족장 (19680 | 3,1 운동 | 대구 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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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김세영(金世榮) | 1889,5 ~1979, 3 | 애족장 (1968) | 3,1 운동 | 경북 영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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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정상득(鄭尙得) | 1886, 7~1969, 9 | 애족장 (1968) | 의병 | 경북 영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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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이헌일(李憲一) | 1917,3~1979, 4 | 애족장 (1963) | 광복회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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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이혜경(李惠卿) | 1889,2~1968, 3 | 애족장 (1963) | 애국 부인회 | 함남 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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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조기홍(趙氣虹) | 1883, 7~1945, 8 | 애족장 (1968) | 국내 항일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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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이동하(李東廈) | 1875, 4~1959, 3 | 애족장 (1963) | 만주방면 | 경북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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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우해룡(禹海龍) | 1906, 7~1969, 3 | 애족장 (1981) | 국내 항일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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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김교훈(金敎勳) | 1896,12~1973, 5 | 애족장 (1982) | 군자금 모집 | 경북 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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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정명준(鄭命俊) | 1900, 7~1959, 8 | 애족장 (1977) | 국내 항일 | 경북 칠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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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김헌술(金憲述) | 1924,10~1988, 3 | 애족장 (1977) | 일본 방면 | 경북 영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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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최고(崔杲) | 1924, 4~1988, 8 | 애족장 (1977) | 흑백당 학생운동 | 대구(광복회 자료에는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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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김원휘(金原煇) | 1884, 7~1949, 5 | 애족장 (1980) | 3,1 운동 | 경북 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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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이승주(李承柱) | 1922, 6~1990, 4 | 애족장 (1968) | 광복군 | 평북 신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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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김석용(金碩用) | 1924, 2~1990, 7 | 애족장 (1982) | 일본 방면 | 경남 통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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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서달수(徐達洙) | 1920, 4~1992, 2 | 애족장 (1977) | 일본 방면 | 경북 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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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강명호(姜明鎬) | 1924, 5~1992, 5 | 애족장 (1977) | 광복관 | 경북 성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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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정동석(鄭東錫) | 1885, 8~1968, 12 | 애족장 (1992) | 임시 정부 | 대구 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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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김홍준(金洪俊) | 1922, 12~1993, 3 | 애족장 (1986) | 대왕산 의거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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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최태만(崔泰萬) | 1918, 5 ~1993, 5 | 애족장 (1986) | 대왕산 의거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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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최태석(崔泰碩) | 1920, 1~1995, 10 | 애족장 (1968) | 대구사범 학생운동 | 경북 청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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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송서룡(宋瑞龍) | 1916, 3~1979, 3 | 대통령 표창 | 광복군 | 평북 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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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장언조(張彦祚) | 1924, 9~1998, 9 | 애족장 (1990) | 광복군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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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장성표(張星杓) | 1924, 8~1999, 1 | 애족장 (1982) | 광복군 | 경북 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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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방봉순(方鳳順) | 1918, 9~1998, 3 | 애족장 (1968) | 광복군 | 황해 안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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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김두희(金斗熙) | 1921, 1, 4~2000, 2 | 애족장 (1986) | 일본 방면 | 경북 성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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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김삼도(金三道) | 1900, 9~1967, 6 | 대통령표창 (1992) | 3,1운동 | 경북 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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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박태현(朴泰鉉) | 1899, 7~1974, 4 | 대통령표창 (1992) | 3,1운동 | 대구 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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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김용규(金容圭) | ? ~ ? | 공적미달 |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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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백기만(白基萬) | 1899~1969 | 공적미달 |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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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김성국(金成國) | 1893~1970 | 공적미달 |
| 경남 양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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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허발(許發) | ? ~? | 공적미달 |
| 경북 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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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박영진(朴永晉) | 1921, 3, 27~1950, 6, 25 | 애국장 (1993) | 광복군 | 경북 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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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신길우(申吉雨) | 1924, 2, 11~2003, 12, 5 | 애족장 (1990) | 광복군 | 경북 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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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최동식(崔東植) | 1927, 1, 27~2005, 4, 29 | 애족장 (1986) | 국내 항일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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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현영만(玄泳晩) | 1921, 5, 4~1981, 4, 6 | 애족장 (1977) | 국내 항일 | 경북 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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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김점학(金點學) | 1906, 10, 6~1960, 3, 5 | 애족장 (2008) | 국내 항일 | 대구 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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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 이상연 보훈처장은 대구시장 재임 중 신암선열공원을 성역화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현장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과 보훈 담당자를 불러 산림청 직원의 해결방안을 전해 주며 보훈처와 협의해 절차를 밟도록 했다. 이후 점용료가 면제되었다. 일대는 토질이 척박해 조림지로는 적합하지 않으나 교외의 다른 국유림과 달리 공시지가가 높아 점용료도 많다.
지방공무원이 행정을 수행하다 보면 중앙정부의 이익과 충돌할 때가 있다. 1980년대 초 국정 목표는 식량 증산이었다. 따라서 전국의 많은 농지를 절대농지로 묶어 다른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제한했다. 대구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림부가 각 시도의 농지 사무 담당자를 불러 항공사진을 내보이며 개발이 덜 되었던 수성들과 황금동의 일부 농지를 절대농지로 지정하라고 했다. 그러나 거부했다. 주택 부족률이 전국 최하위였던 대구시로서는 농지 보전이란 국가목표보다 택지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을 살펴보면 일선 기관인 시나 도의 사정을 충분히 검토하지 아니하고 제정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방공무원은 중앙정부가 만능이 아니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지방의 입장을 따져보고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
신암선열공원 점용료 면제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국립으로 승격될 때까지 30여 년간 점용료를 냈을 것이며 그 금액도 상당했을 것이다. 시립신암선열공원의 국립신암선열공원 승격은 지역 국회의원, 대구시장과 광복회 등 관련 단체 등 많은 시민들이 노력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조그마한 노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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