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구의 소재지이자 법원과 검찰청, 대구문화방송 등 언론기관, 증권사 등 금융기관, 수성구민운동장, 범어도서관, 그랜드호텔, 고급아파트 등 유수의 기관이 즐비한 범어동의 유래에 대하여 수성구청의 홈페이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구부 수북면의 지역으로 조선 시대 범어역(泛魚驛)이 있었으므로 범어 또는 역촌(驛村)이라고도 하였고, 1914년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10월 1일 대구구역이 확정됨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500년 초 철원 부사를 지낸 구수종(具壽宗 ?~?)이 정착하면서 일군 마을이라고 한다. 현재 범어천주교회가 있는 산이 붕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며, 그 아래 냇물이 흐르고 있어 마치 고기가 떠 있는 모양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뜰 범(泛), 고기 어(魚), 자’를 써서 범어(泛魚)라고 했다고 전해온다.”
이러한 구청의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범어대성당(마리아유치원 앞)에도 1990년 8월 15일에 세운 붕어 형상의 조형물을 받치고 있는 빗돌의 윗면에는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내력과 아랫면에는 구수종이 명명했다는 지명 유래가 새겨져 있다.
“(물고기는) 로마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인데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희랍어의 첫 글자를 따서 모으면 물고기 【ΙΧΘΥΣ】라는 희랍어가 된다.”
“범어동의 유래는 1450년 철원 부사를 역임한 구수종이 마을을 개척하여 현재 천주교범어교회(天主敎泛魚敎會) 동산이 산 아래 흐르는 냇물 (泛魚川)에 붕어가 입을 벌리고 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자와 ”고기 어(魚)“ 자를 합하여 범어동(泛魚洞)이라 하였다.” 라고 새겨 놓았다.
따라서 위의 설명대로라면 현재의 범어동 이름은 구수종이 지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의 생존연대 16세기 초로 260여 년 후인 1768년(영조 44)에 간행된 『대구읍지』에는 “무릇 범(凡), 어조사 어(於)”의 “범어(凡於)”이다. 따라서 구수종의 명명설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정도 해 볼 수 있다. 마을 주민으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이곳이 원래부터 기독교 성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범어동(泛魚洞)이라고 입소문을 퍼뜨릴 수 있다. 그러나 현, 범어대성당의 모태가 1925년 황청동 홈골의 은곡공소. 이어서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지금의 이름 “뜰 범(泛), 고기 어(魚)”의 “범어(泛魚)”가 처음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1899년(고종 36)에 간행된 『대구읍지(大丘邑志)』의 방리(坊里) 편이다. 즉 대구부 수성현 방리(坊里)에
“수북방(守北坊):부(대구)의 동쪽 10리에 있다. 소속된 동이 일곱이니, 금정리(琴汀里)·만촌리(晩村里)·각계리(覺界里)·효목리(孝睦里)·황청리(黃靑里)·소지리(所只里)·범어리(泛魚里)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원(譯院) 조에는 여전히 “범어역(凡於驛)은 부(대구)의 동쪽 9리에 있었는데 을미년(1895?)에 혁파되었다”라고 하였고. 또 장시(場市) 조에도 “범어장(凡於場)은 부(대구)의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수북(守北)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해 마을 이름은 바뀌었으나 역(驛)과 시장(市場)은 여전히 종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나 다만 그 기능은 모두 폐지되었다.
그 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다.
1910년 10월 1일 일제(日帝)는 칙령 제357호로 대구군(大邱郡)을 대구부(大邱府)로 바꾸고, 이어 총독부령 제8호“면(面)에 관한 규정”에 의거 대구를 29개 면으로 개편할 때 범어동(泛魚洞, 228호)은 수북면(守北面)의 소계동(小溪洞 35호), 황청동(黃靑洞 94호), 지계동(支界洞 55호), 만촌동(晩村洞 60호), 검정동(檢汀洞 38호), 효목동(孝睦洞 75호)과 더불어 7개 동의 하나가 된다.
이때 수북면의 전체 가구 수가 585호인데 범어동은 228호로 40%를 차지할 정도로 7개 동 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땅 이름은 그곳의 지리나 지형적인 특징, 역사와 문화가 응축되어있는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불과 12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소계동, 지계동, 검정동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황청동은 황금동(黃金洞)으로 변했다. 이런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구수종 명명설은 설득력이 없다. 또 성당 안의 조형물의 기재 내용 중 1450년도는 구청 홈페이지 1500년 초와 차이가 있는데 구청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오래 세월 그렇게 믿어 왔다면 이 역시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즉 인구시비(人口是碑)라는 말이 있다. 즉 여러 사람의 말은 돌에 글을 새긴 빗돌(碑石)과 같다는 뜻이다.
범어대성당 안에 있는 범어동 유래비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름이 뜰 범(泛) 자와 고기 어(魚) 자로 바뀌어서 그런지 범어동의 랜드마크가 된 범어성당이 대구대교구 주교좌 대성당으로 승격되어 권위가 높아졌고, 복음전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구수종 명명설이 인정받은 셈이다.
구수종은 본래 서울 사람이다. 그가 정착한 범어 일대는 처가(妻家)가 있는 곳이다. 아내 전씨(全氏) 집안은 대구의 대표적 명문 사족(士族)이다. 특히, 장인은 예조판서 전백영(全伯英)의 손자인 전순손(全順孫)으로 그의 증손자가 대구에서 유일한 퇴계 직계제자이자 형 전응창(全應昌)과 더불어 대과에 급제한 전경창(全慶昌)이다.
특히, 구수영의 처 증조부 전백영은 출생지가 고모 팔현마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성문화원이 펴낸 『대구의 뿌리 수성 개정판(2019』 인물 편에 수록되지 아니하였다. 그가 인물 편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고려 조 문과 출신으로 태종 조 대구 출신으로는 가장 고위직인 판서를 역임했고, 팔현(八峴)의 유래가 그가 살던 집의 향나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의 인물됨과 향나무 이야기를 필자가 매일신문(2011, 9, 29)에 기고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망우당공원의 고모령노래비가 있는 곳에서 팔현마을~고모역~가천을 이어 성동마을의 고산서원까지 이어지는 길 주변의 문물과 역사자원을 조사해 본 바 있다.
그때 만난 팔현마을의 박병도(朴炳道, 74세) 님에 의하면 마을 이름 팔현은 “고개 옆에 정씨 성을 가진 역적 무덤 양쪽의 향나무가 팔(八)자 모양으로 생겨서 팔현(八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래가 적힌 마을 앞 비석을 보라고 했다. 1993년에 세운 ‘범죄 없는 마을’ 비였다.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무덤의 주인공은 역적이 아니고 ‘조선 초 판서 정숙영’이라는 분이었다.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정숙영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인데도 인명록에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모동 쪽의 이야기를 더 발굴하기 위하여 일단 접어두었다. 어느 날
‘조선 태종 조 예조판서 문평공 전백영에 관한 고찰’의 저자 구본욱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평공은 고모 출신이니 비록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흔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꺼이 동의하여 후손 한 분을 모시고 왔다.
1988년,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펴낸 『우리고장 대구 (지명 유래)』 고모동 편에 의하면 “전백영은 이곳에서 태어나 파동으로 이사 가기 전인 1369년(공민왕 18년) 살던 집에 심은 향나무가 있었는데 일본인이 캐가고 지금 키가 작은 몇 그루가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어 함께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행한 후손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저자 구 선생과 함께 팔현마을로 향했다. 일대를 뒤진 끝에 잡목 속에 섞여 있는 몇 그루의 향나무를 발견했다. 팔자형(八字形)은 아니었으나 문평공이 심은 나무에서 자라난 맹아가 분명해 보였다.
팔현이 옛 고모 땅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유래비의 판서 정숙영을 ‘판서 전백영’의 오기로 볼 때 이곳은 ‘생가터’가 틀림없다.
공은 1345년(고려 충목왕 1년) 수성구 고모에서 태어나 파잠(巴岑, 현, 파동)으로 이거(移居) 하면서 아호마저도 파동과 신천에서 따와 파계(巴溪)라고 했다.
정몽주로부터 글을 배워 27세 때인 1371년(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했다. 초임부터 관료들의 비리와 왕의 실정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간관(諫官)을 맡았다.
권신 이인임을 탄핵했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10여 년간 하동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간언의 정당함이 알려지면서 수원 부사 좌·우 사의로 다시 복귀했으나 이도 잠시 충청도 결성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조선의 개국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공의 관직은 대체로 순풍을 만난다.
그러나 초기에는 역시 간의대부(諫議大夫) 즉 언관(言官)이었다. 그 후 병조전서, 풍해도(황해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등을 역임했다.
1399년(조선 정종 1년) 공의 나이 55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던 중 왕명으로 조정에 복귀,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며 기강을 확립하는 오늘날 검찰총장과 역할이 비슷한 대사헌(종2품)을 맡았다.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임금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유를 묻자 ‘공자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시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어 ‘임금의 배워야 할 학문으로는 대학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범어동의 랜드마크가 된 범어대성당
1400년(정종 2년) 마침내 고향 땅을 다스리는 경상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1404년(태종 4년)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使)로 명나라 서울에 가서 새해를 축하하고 세자의 책봉을 청하였다. 그해 7월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1406년(태종 6년) 다시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1412년(태종 12년) 건강이 좋지 못하여 공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고자 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면서 ‘전재신(全 宰臣)이 중외로 근무하여 공로가 있는데 지금 돌아간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말 먹이와 간식을 주어 보내라’고 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왕을 잘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고 외직에 나가서는 청렴한 목민관으로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했던 공은 그해 68세로 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3일 동안 조회를 금지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장례를 지원하도록 하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대구부가 읍지(邑誌)를 만들면서 조선 시대 대구 인물 조에 맨 처음 등재 해 공을 기렸다. 이번 발품을 통해 우리는 오랜 세월 묻혀있던 문평공의 생가터와 그가 수식(手植)한 향나무를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런 작은 노력에 의해 대구의 향토사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니 앞으로 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다.
구수종 역시 명문의 후손이다. 능성구씨 도원수파로 큰아버지 구치관(具致寬)은 영의정을 했고, 아버지 구치홍(具致洪)은 무과에 급제한 후 해주 목사, 강릉 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아우 구수영(具壽永)은 영응대군(세종의 8번째 아들)의 사위로 중종반정의 2등 공신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구수종에 대한 기사는 4회가 나온다. 첫째는 연산군일기 1497년( 연산군 3) 2월 22일에 “강동(江東) 현감이던 구수종이 아버지가 늙어 부양하기 쉽도록 경직(京職) 즉 서울 소재 관서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아우 구수영(具壽永, 1456~1523)이 보살필 수 있으니 불허한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는 그 이튿날로 연산군이 구수종의 건의가 전날 부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직(京職)으로 바꾼 사유를 묻자 이조(吏曹)에서 다른 도의 수령이 빌 때까지 한시적으로 서울에 머물게 했다고 했으며 세 번째는 같은 날로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네 번째 기사는 1504년(연산군 10) 윤, 4월 17일 기사로 구수종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정성근, 조지서 등을 죄주어야 한다고 연산군께 아뢰는 기사다.
기사를 보면 구수종은 연산군 초에 강동 현감을 지냈으며, 당시 아버지 연로해 부양이 필요했고 아우가 2년 후에 일어난 중종반정의 2등 공신 구수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나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등 양 사화에서 무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즈음을 구수종이 아우 구수영보다 6살 더 많다고 가정한다면 (물론 2~3살 또는 그 이상 10살, 터울일 수도 있지만, 편의상 설정) 구수종은 1450년생이 되고, 갑자사화 때는 55세가 된다.
후손에 모(某) 씨에 의하면 대구로 내려온 때가 갑자사화 전후로 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 나이는 50대 중반 시기는 1504~151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범어대성당의 구수종 범어동 명명설 1450년은 그가 태어난 해와 비슷하게 되어 1500년 초로 바로잡을 필요성이 대두된다. 있다.
팔현은 영조 대의 지도 <광여도>나 <달성하씨 보첩(譜牒)> 등에는 파리 승(蠅), 재현(峴)의 “승현(蠅峴)” 즉 “파리현”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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