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충신 박제상 순국비
나무를 찾아서 나라를 찾아서 카페 회원 34명이 2023, 9월 19일 ~20일 1박 2일 동안 대마도를 찾았다. 2011년 8월 20일 밀양 일원을 시작으로 혹한 혹서기(酷暑期)를 제외한 매월(每月) 전국의 나무와 숲을 찾아 나선 100회 기념 답사이자 첫 해외 답사였다. 회원을 규율하는 정관이 없으면서 12년 (코로나 19 2년여 제외)로 모임이 지속 된 까닭은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회원 스스로도 놀랄 만한 긴 여정이었다. 교수, 교사, 일반직 공무원 출신 은퇴자들이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습관이 체화(體化)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닮으려고 하는 마음이 늘 충만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대마도는 전에 한 번 가봤다. 삼나무와 편백(扁柏) 나무가 울창하고 다양한 아열대 식물이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가장 강한 인상을 준 나무는 백제인들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였다. 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크기로는 두 번째라는 이야기를 듣고 은근히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러나 태풍으로 잎이 떨어져 본래 모습을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워서 이번에 다시 가면 반드시 아름다운 자태를 담아오고 싶었는데 이번 답사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한,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 3000그루 자생지도 보고 싶었다. 여행사의 계획서에 2곳을 필수 코스로 추천했다. 이런 기대를 안고 대마도에 발을 디뎠으나 둘 다 허사였다. 은행나무는 공사 중이라 못 간다 하고, 이팝나무 군락지는 안내도면과 다른 장소에 하차시켰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우리네와 달리 운전사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아 매우 씁쓰레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한자리에 앉아 그동안 카페를 위해 수고한 회원을 위로하고 약간의 반주로 우의를 다진 친교의 시간을 가진데 있다. 이른바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성실한 여행사에 요구해 대신 추가한 곳이 박제상 순국비였다.
박제상이 순국한 대마도 미나토항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나오나, 정사 삼국사기에 따라 박제상으로 표기했다 그 이외에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각기 복호 卜好, 미사흔 未斯欣이라 했으나 이글은 삼국유사를 따랐다)은 신라의 매우 유능한 관리였던 것 같다. 제17대 내물왕 재위 39년(390) 왜왕(倭王)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죄를 일러바치는 성의를 보이는 대신 왕자 한 명을 왜국에 보내 주시는 성의 보여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10살인 넷째아들 미해(美海)를 보좌관을 딸려 보냈다. 그러나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났는데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순국비 부근에 갈대는 없고 억새만 바람에 날리고 있다.
또한, 제19대 눌지왕 3년(419)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 임금의 아우(내물왕의 둘째 아들)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양국의 화친에 도움 되는 일이라 여기고 아우 보해(寶海)를 보좌관 김무알(金武謁)과 함께 고구려에 보냈으나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재위 9년(425) 왕이 인질로 보낸 두 아우를 구출하기 위해 신라 안에서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을 모아 잔치를 베풀며 “내가 두 아우를 구출하지 못하면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다. 누가 나서서 해결할 사람 없겠는가?” 하니 한결같이 삽라군(歃羅郡) 태수(太守)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했다. 왕이 박제상을 불러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니 제상은 오히려 기뻐하며 고구려에 볼모로 간 왕자를 마침내 구출했다.
왕이 잠시 기뻐하더니 이번에는 왜국(倭國)애 머무르고 있는 아우 미해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했다. 이에 제상이 집에 들르지도 아니하고 다시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신라 왕이 죄 없는 우리 아버지와 형을 죽여 도망쳐 왔다고 거짓말을 하니 집을 주고 안심하며 살게 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왕자 미해와 함께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 왜왕에게 바치니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미해에게 신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그대는 부모 형제와 같은데 어찌 버리고 나 혼자 갑니까” 하니 제상이 이르기를 “신은 오직 왕자님을 구해 임금을 기쁘게 하는 신하로서 족할 따름입니다.” 하고 미해가 거처하든 방으로 들어가 다음 날 아침 왜인들이 보려고 하자 어제 사냥으로 피곤해 늦잠을 잔다고 거짓 해명했다. 저녁때가 되어도 기척이 없자 주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이미 오래전에 신라로 갔다”고 하니 즉시 왜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왜왕은 말 탄 병사들에게 미해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왜왕은 제상을 가두고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 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신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왜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 신라의 신하라고 한다면 온갖 형벌을 가할 것이다. 만약 나의 신하라고 한다면 후한 녹봉을 상으로 주겠다.” 하니 제상이 이르기를 “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했다.
화가 난 왜왕이 발바닥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지금도 갈대 위에 있는 피의 흔적을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 이냐?” 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라의 신하노라.” 고 했다. 다시 그를 뜨겁게 단 철판 위에 서게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 물었다. 제상은 역시 “ 신라의 신하이다.” 라고 하자 왜왕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대구 나무카페 답사 100회 기념 대마도 답사기념 촬영
한편 신라에서는 미해가 무사히 돌아오자 큰 잔치를 벌이고 모든 죄인을 풀어주었으며, 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딸은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반드시 박제상의 순국비를 보고자 고집했던 이유는 이런 감동적인 충신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고, 또한, 발바닥 살갗을 벗기는 것만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인데 거기에 더 해 날카롭기 그지없는 줄기를 베어낸 갈대 그루터기 위를 걷게 했다니 그 아픔도 헤아려보고 더 나아가 요(堯)임금의 딸이자 순(舜)임금의 왕비 아황(娥黃)과 여영(女英)의 소상반죽(瀟湘斑竹) 이적처럼 제상의 붉은 피가 물던 갈대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순국비 옆에는 억새만 무성하며 쓰시마 해협(海峽)에서 부는 바닷바람에 무심히 흔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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