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안동권씨 의성 입향조 행정 권식 선생과 사촌리 행단

이정웅 2022. 1. 22. 11:20

안동권씨 의성 입향조 행정 권식이 조성한 행단 원레 3그루를 심었다고하나 임란, 호란으로 2그루가 죽고 1그루 남았다가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불타고 그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지금의 은행나무 

 

행정을 기리는 기천 정사 
14세손 정인이 쓴 행단 시판 

안동권씨 의성 입향조 행정 권식 선생과 사촌리 행단

 

 

 

의성 점곡면 사촌 마을은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 김자첨(金子瞻, 1369~1454)14세기 말에 개척한 마을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낙향한 송은 김광수, 송은의 외손자 서애 류성룡, 퇴계 학맥을 이은 거유 김종덕(金宗德), 임란 창의 정제장 김사원, 병신의병대장 김상종, 국채보상운동 참여자 75명과 과거 급제자 46(문과 12, 무과 1 생원 24, 진사 8, 도산별과 1), 문집류를 남긴 분이 94명에 이르는 충절과 문향이 가득한 마을이다.

뿐만, 아니라. 일명 서림 즉 가로숲(천연기념물, 405)과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107)가 있어 나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볼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알려진 것, 의외 숨은 보석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행단(杏壇)이다. 행단은 유학의 종조 공자(BC 551~BC479)가 곡부(曲阜)에서 임간(林間) 수업을 했던 데서 유래 된다. 이를 두고 그 숲이 은행나무라고도 하고, 살구나무라고도 한다. 실제 중국에서도 혼동하고 있는 볼 수 있는 데 대성전 앞의 행단에는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혼식(混植) 되어 있고, 공자의 후손이 사는 공씨가(孔氏家)에서는 행단에 빗대 은행나무 열매를 요리의 재료로도 쓴다.

그러나 1645(인조 23) 함헌(咸軒, 1508~?)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곡부현 궐리(闕里, 공자의 탄생지)에 들러 후손 공대춘(孔大春)을 만나 선물로 받아온 그림을 1887(고종 24) 전주 지역 화가 나능호(羅能浩)가 베낀 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0)를 보면 살구나무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로 굳어져 성균관, 향교 등 유학을 가르치는 곳에 심는다. 특히,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사적 제109)을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고 하는데 고불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를 가르친 데서 유래한다. 행단이라는 말을 고유명사화 곳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안동에도 없다.

이와 달리 사촌에는 행단이 있다. 주인공은 행정(杏亭) 권식(權軾, 1423~1485)으로 1423( 세종 5) 안동부 동문동에서 태어났다.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1452(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사마(司馬)를 거쳐 1454(단종 2) 창원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를 적용하여 엄정한 규율로 학생을 가르치니 훗날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는 토대를 쌓았다. 1457( 세조 3) 비운의 왕 단종이 승하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 사촌에 터를 잡으니 처 안동 김씨의 친정 곳이다. 부인이 사촌 입향조 김자첨의 24녀 중에서 4녀이기 때문이다. 세조가 교도(敎導), 시직(侍直) 등의 벼슬을 내리며 다시 조정에 복귀하기를 청했으나 병을 핑계로 끝까지 출사하지 아니하고 지조를 지켰다.

이후 행단을 쌓고 은행나무 3그루를 심어 학문과 시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485(성종 16) 향년 63세로 졸했다.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흠조는 진사, 둘째 경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맹을 셋째 숭조는 별제를 역임했다. 유고로 행정선생실기가 있다.

피붙이들로 장기 현감 귄희순, 이조판서에 추증된 권수경 등을 비롯해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사촌 600념사 김광남 2011에 의하면 행정은 사촌으로 들어와 행단을 조성하고 은행나무 3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를 입어 2그루는 고사하고 1그루만 광복 후까지 온전하게 자랐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싹이 자라고 있으며 공이 행단을 두고 읊은 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공자의 행단의 현송을 일찍이 따르지 못했으니 杏壇絃誦未曾從

남겨 놓은 뿌리 캐어 스스로 심었노라 採得遺根手自封

자손에게 전하노니 정성드려 보살펴라 寄語雲仍須勿剪

뒷날 행단의 위용을 닮아감을 보리라 佇看他日習儀容

 

이 시문을 보면 공자가 행단에서 즐기던 현악기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 의미를 살려 은행나무를 심었으니 후손들은 정성스럽게 가꾸어라. 그대들의 성취를 지켜보리라고 말을 맺었다. 1860( 철종 11) 사림의 공의로 공을 제향하는 기천리사(沂川里祠)를 지었으나 1896년 일병(日兵)의 방화로 소실되자 1934년 후손들이 기천정사(沂川精舍, 의성군 문화유산 제38)로 이름을 바꾸어 잘 관리하고 있다. 행정의 행단은 유향(儒鄕) 영남지방의 명물 될 수 있다.

그러나 후손 권정남씨을 어렵사리 만나 현장을 살펴보니 주변에 민가가 들어 서 있고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싹이 자란 것이라기보다 누군가 심었거나 씨가 떨어져 자란 것 같았다. 은행나무 고유 모습을 잘 유지하고 수세도 좋다. 다만, 좁은 마당 안이라 언제 훼손될지 모를 처지에 놓여있다. 자람에 지장이 되는 건물을 철거하고 적당한 곳에 행단을 복원하고 유허비를 세워 행정을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