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많은 노거수를 찾아다니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발굴해오고 있다. 살아 있는 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예외적으로 죽은 나무도 있다. 법보사찰 해인사를 창건한 신라 제40대(재위:800~809) 애장왕이 심은 일주문 부근의 느티나무도 그렇고, 호학(好學) 군주 정조(재위: 1776년~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隆陵)의 수호사찰로 화성의 용주사를 중건하고 심은 회양목도 그렇다.
전자는 표석에 심은 사람이라도 간단히 언급해 놓아 애장왕과 해인사와 관계를 살펴볼 기회를 제공해 주는 데 비해 용주사의 정조가 심은 회양목은 한때 천연기념물(제264호)로 보호해온 나무인데도 설명 표지판 하나 없다.
이런 우리나라의 나무 문화와 달리 중국은 달랐다. 물론 중원 천지를 다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곡부에서 만은 그랬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분인 자공(子貢)이 심은 죽은 해(楷) 나무가 썩지 않도록 지붕을 덮는가 하면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고 빗돌을 세우고 크게 써 놓았다. 그런데 며칠 전 청도 매전면 식성군 이운룡(李雲龍, 1562~1610) 장군의 생가터를 방문하고는 우리나라에도 중국과 비슷한 나무 문화가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날은 이정욱 성균관유도회 대구본부 부회장, 이동환 일족도 동행했다.
식성군(息城君)은 임란 시 옥포만호로 있으면서 상관인 경상우수사 원균이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도망가려고 하자 크게 항의하면서 율포 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 도움을 받도록 하여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러 낸 분이다. 옥포해전은 수군과 육군을 불문하고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다.
식성군은 명문 재령이씨 청도 입향조 이계손(李繼孫)의 방손(傍孫)으로 옥포해전 이후에도 사천·진해·안골포·부산해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우리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비변사 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軍職)에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겨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서원, 석동서원과 의령의 기강서원에 제향 된 공신이다. 저서로는 『식성군실기』 등이 있다. 숙부 몽남 (夢男), 두 아우 운붕(雲鵬), 운봉(雲鳳), 조카, 인(仁) 등 4명의 선무원종공신과 공을 포함, 모두 5명의 공신이 배출되었다.
명나라 유격장 모국기(茅國器)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선조와 작별인사를 할 때 “수로 총병 이운룡은 육군의 정기룡과 함께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것에서 이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는 공이 어릴 때 심은 소나무가 용트림하는 자세로 자라 훗날 사람들이 용송(龍松)이라 부르며 고성이씨 친목계 대표자 이재기(李在基), 삼화저미조합 대표자 이종철(李鍾徹), 여흥예씨 상수계 대표자 예창기(芮彰基) 등 세 사람이 1938년 5월 “광명대 용송(光明臺 龍松)” 이라는 빗돌을 세우고 보호했다. 그러나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쓰러져 마침내 고사하고 말았다. 그 후 방 후손 우섭(祐燮)이 식성군 별세 369년을 맞은 1978년 춘분 절에 “식성군동계이선생수식용송유지기념비”를 세우니 비문은 다음과 같다.
소백감당(召伯甘棠) 무후사백(武侯祠柏) 종비수식(縱非手植) 인유애석(人猶哀惜)
소백(주나라 성왕 때 선정을 베푼 관리)의 상징 팥배나무와 제갈량 사당의 측백나무처럼 손수 심은 나무가 아니라도 사랑하고 아깝게 여기는데
신자용송(矧玆龍松) 유공소식(惟公所植) 창염적갑(蒼髥赤甲) 열세사백(閱歲四百)
이 용송은 오직 공이 심은 나무로 푸른 솔잎 검붉은 껍질 400년 세월을 겪어 왔다.
내공지백(萊公之伯) 유시이고(有時而枯) 자식행수(玆植杏樹) 이대종소(以代種莦)
충신(내공, 송나라 충신 내국공 구준(寇準))의 절의를 상징하는 나무가 어느 때 고사하여 이에 생명력이 끈질긴 은행나무를 심어 대신하고자 하네
서기종차(庶幾從此) 고모유소(高慕有所) 수지편석(樹之片石) 촌성시표(寸誠是表)
바라건대 이렇게라도 숭모하는 바를 조각 돌 비석을 세워 작은 정성 표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마을 유지들의 돌봄과 후손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이 빗돌은 현재 남의 밭, 한 귀퉁이 한 평 남짓 자리를 얻어 겨우 관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용송 대신에 길가에 심은 은행나무도 오고 가는 차에 받혀 언제 훼손될지 모를 정도이다. 조선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고 수많은 수륙군(水陸軍) 중에서 이순신, 권율 등 불과 18명만 뽑힌 선무공신인 장군에 대한 예우치고는 너무 소홀한 것 같아 아쉬웠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곡군 석적읍 망정 1리의 호국목 (0) | 2023.08.23 |
---|---|
안동권씨 의성 입향조 행정 권식 선생과 사촌리 행단 (0) | 2022.01.22 |
약포 정탁 선생과 도정서원 느티나무 (0) | 2021.12.08 |
서애(西厓)의 손자 이송당 류백지(柳百之)와 의성 단밀 (0) | 2021.09.14 |
퇴계의 두 번째 처의 외가 거창 영승마을 사락정(四樂亭) 매화 (0) | 2021.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