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호정
조선 오백여 년 중 가장 큰 국난은 임진왜란이다.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 구하기에 앞장선 인물을 묻는다면 대다수 사람은 충무공 이순신 떠 올릴 것이며 다음으로 충무공을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전시 조정을 이끈 서애 류성룡, 다음은 의병장 곽재우 등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약포(藥圃)의 정탁(鄭琢, 1526~1605)의 공이다. 원균의 모함과 왜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의 남해안 상륙을 막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서울로 끌려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약포가 “이순신을 살려 주소서.”라는 상소를 올려 백의종군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노여움과 질시가 하도 커서 누구도 구명하려 들지 않을 때 약포가 해냈기 때문이다.
그때 약포의 목숨을 건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도 살아남지 못했고 명량대첩도 없었을 것이다. 약포는 충무공 이순신뿐만 아니라 호남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구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충장공의 애석한 죽음은 지금도 광주사람들의 마음속에 충장로(忠壯路)라는 거리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점을 보면 약포는 여느 중신들과 달리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 같다. 약포의 임란 극복 노력은 이뿐만 아니었다. 전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외면하고, 중국으로 명망까지 시도한 선조가 수습의 책임을 왕자 광해군에게 맡겨 분조(分朝)를 만들 때 그 실무를 맡게 되어 아들 윤목(允穆)과 함께 2년여 전장을 누비며 전의를 상실한 수령들을 독려하고 의병을 동원하며 지원했다.
약포는 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장 두사충(杜師忠)도 구제했다. 그는 벽제관 전투에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 즉 진지 구축 담당자로 참전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와 달리 명군이 크게 패했다. 책임을 물어 이여송이 군령으로 참수하려고 하자 약포가 찾아가 이 패전은 조선군도 책임이 있으며 그가 비록 풍수를 잘 안다고 하여도 중국과 조선은 지세가 다르고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있으니 죄를 감해 줄 것으로 청원하면서 “처형하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 고 하여 목숨을 구해 주었다.
훗날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해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정착했다. 뽕나무를 키우며 살 때 이웃 홀로된 과부를 연모해 “뽕도 따고 님도 본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 후 후손들이 만촌동으로 옮겨 모명재를 짓고 그를 기리고 있다.
두사충은 그 뒤 풍수지리서 『감여요람(堪輿要覽)』을 지어 약포에게 헌정(獻呈)했다. 훗날 이 사실이 두씨 문중에 알려지면서 1971년 『모명선생유결(慕明先生遺訣)』이라는 이름을 달리하여 출판했다. 이 풍수이론서는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치고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내용이 심오하다고 한다.
“약포은 본관이 청주로 예천 출신이다.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를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 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조 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구원함)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일부 첨삭)”
명문 청주정씨의 임란 시 활약은 약포뿐만 아니었다.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1538~1602)는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원군(援軍)을 파견해 준 명나라와 외교를 강화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통천군수로 재임하면서 선조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냈고 의병을 일으켰다.
1640년(인조 18)에 세운 약포를 기리는 도정서원은 웅장한 문루와 사당, 동서재, 강당이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내성천이 휘돌아 흘러 경관이 수려하며 낙향하여 전란에 시달린 고단한 몸을 추스르던 읍호정(挹湖亭)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왕성한 수세를 자랑하며 공의 드러나지 행적처럼 조용히 서 있다. 약포는 갔어도 나무는 남아 나라 사랑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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