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퇴계의 두 번째 처의 외가 거창 영승마을 사락정(四樂亭) 매화

이정웅 2021. 8. 3. 16:35

퇴계가 장인 권질의 요청으로 작명해준 정선인 전철의 사락정

 

퇴계가 처향을 방문하여 지은 "영승촌조춘" 친필 시판
사락정 주변의 매화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요 며칠 사이 절실히 다가온 적이 없었다. 거창 위천을 끼고 있는 대표적인 경승지와 문화유산인 동계, 정온 종택과 수승대, 연산군과 중종의 정비를 배출한 거창신씨 집성촌 황산마을은 물론 성리학자 임훈(林薰)의 갈계숲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다녔다.

마리초등학교를 지나 위천 가에 오래된 소나무가 물길 따라 나란히 서 있는 영승마을도 가본 곳이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이 살기에 오랜 세월 나무를 잘 가꾸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였다. 그러나 농사일로 들에 나가 누구 하나 만날 수 없다. 그냥 휙 둘러보고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1790(정조 14) 대구와 인근 고을의 지암(遲庵) 이동항(李東沆), 경안(景顔) 이헌우(李憲愚), 사원(士源) 박성수(朴聖洙), 사정(士貞) 조택규(趙宅奎), 성거(聖居) 이동연(李東淵), 진여(進汝) 이동급(李東及) 6명의 선비가 328일 칠곡을 출발하여 성주, 합천, 거창, 함양을 거처 54일까지의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암이 일정을 자세히 기록한 방장유록(方丈遊錄)을 남겼다. 이 여행에 동참한 함안인 사정의 9대손 조기훈(대구향교 장의)230여 년 전 선조의 뒤를 밟아보기 위한 자료 조사에 동행하면서 다시 찾았다.

마을은 일행이 묵어간 곳이기도 하지만 퇴계가 장인 권질(權礩, 1483~1545)의 환갑을 축하하려고 왔던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 부인 안동권씨의 아버지 권질은 1504(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폭로한 언문투서사건이 일어나자, 앞서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자손들의 짓이라 하여 처벌당한 뒤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풀려나왔다. 그 뒤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하고 자손을 등용할 때 아버지도 복권되고 자신도 음보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후 다시 집경전(集慶殿순릉(順陵후릉(厚陵) 등의 참봉을 역임한 뒤, 1517(중종 12)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로 승진되었다. 1519(중종 14)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훈구세력에 의해 축출당한 뒤 1521(중종 16) 심정, 남곤 등이 사림파와 친밀했던 안처겸(安處謙)이 훈구대신을 해치려 하였다는 무고로 다시 쫓겨날 때 아우 권전(權磌)이 장살 되고, 권질은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538(중종 33) 유배가 풀리자 가족을 이끌고 처가 마을인 거창, 영승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이다.

영승마을은 정선전씨 집성촌으로 퇴계의 처 외숙 사직(司直) 전철(全轍, 1481~1558)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선대가 물려준 초가 정자를 기와로 중수하고 형 진사 전식(全軾)과 더불어 전원을 즐기든 정자가 있어 권질(權礩)도 두 자형과 잘 어울렸다. 이에 1542(중종 37) 권질이 사위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정자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니 농사짓기, 누에치기, 고기잡이, 나무하기 등 네 가지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 하여 사락정(四樂亭)”이라 지어주고 그 뜻을 담은 기제사락정병서(寄題四樂亭幷書)”를 보냈다.

그 후 퇴계가 43세 되던 1543( 중종 38) 14일 장인의 회갑을 맞아 영승촌을 찾았다, 퇴계는 이미 작명해 준 사락정에 올라, 한 편의 시 영승촌조춘(迎勝村早春)”을 남기고, 본래 신라와 백제 사신을 맞고 보내는 곳이라고 하여 영송(迎送)마을로 불렀는데 영승(迎勝)으로 바꿔주고, 3일간 머물다가 17일 떠났다. 그러나 마을 이름은 오늘날까지 불리고 사락정에는 기제사락정병서(寄題四樂亭幷書)와 친필의 영승촌조춘시판에 걸려 있어 500여 년 전의 퇴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영승촌조춘의 시문은 다음과 같다.

 

영승마을에서 이른 봄을 맞이하니

눈앞에는 매화와 버들이 이미 새싹을 다투네

봄바람 먼저 숲 끝에서 창발(暢發)하려 하고

북쪽 기러기는 물가에서 막 돌아가려 하네.

누가 농월담(弄月潭)의 달빛을 희롱하려는 객이 되었는가.

나는 일찍이 운구에 기문을 지은 사람이네

술 동이 앞에 두고 사헌부의 일을 말하지 말게

야인의 아취 바야흐로 흔쾌하여 본디 참모습에 흡족하니

 

마을의 영승서원은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 5개 도의 사림이 세웠다. 퇴계와 사락정 주인 전철이 배향된 것은 높은 학문이나 지역 연고로 볼 때 특이하다고 할 것 없다. 그러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배향된 것은 이외였다. 충청도 출신이자 우리나라 18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된 그가 왜 이곳 사림이 받들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궁금했다. 건너 받은 영승서원중건기를 보니 동춘당이 병자호란을 피해 마을에 머물며 지역의 선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는 남한산성에서 많은 백성이 희생되고 인조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였다. 당시 최고 지식인인 그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락정 주변의 몇 그루 매화는 이런 사연을 품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