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경위와 보존에 참였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빗돌
일직손문(一直孫門)의 유산 범어네거리 은행나무
범어네거리 범어지구대 앞 교통섬에는 수령 500년(1972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 수고 13.5m, 둘레 4m의 큰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다. 오래된 만큼이나 원 둥치는 죽고 뿌리에서 돋아난 싹이 자라 우뚝 서 있는 것이 고목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가지 아래에는 2개의 빗돌이 있다.
하나는 하트모양의 오석(烏石)이고, 다른 하는 자연석에 오석을 박아 글씨를 새긴 것으로, 전자는 후자의 글씨가 잘 보이게 다시 만든 것 같고, 후자는 정화여·중고 교정에 옮겨 심을 때와 범어네거리로 옮길 때까지의 과정을 담았고 보존위원의 명단도 각석(刻石) 해 놓았다. 후자의 빗돌 전문은 다음과 같다.
상동(上洞) 은행(銀杏)나무
이 나무는 조선 세조 14년(1468) 상동 268번지에 심은 나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 고장의 전설과 얼을 간직한 귀중한 거목으로 1972년 8월 31일 대구직할시 보호수 제18호로 지정 보호하던 중 1981년 상동 중로 2류 8호 동서도로 (현, 상화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철거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전 동민의 심정과 자연을 보존하는 정성을 기리기 위하여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우람하고 의젓한 이 나무를 1981년 9월 30일 이곳 정화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정화여중·고 이전으로 2001년 4월 1일 범어네거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보존위원(保存委員)
손량달(孫亮達), 김갑상(金甲相), 도영대(都永大), 손량걸(孫亮傑), 허동(許東), 손중근(孫重根), 손진국(孫振國), 이재석(李在石), 손중헌(孫重憲), 강윤운(姜潤雲), 변정환(卞廷煥), 손중식(孫重植), 이종렬(李宗烈)
이 나무는 몇 가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첫째는 1981년이라면 나무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달라 도로건설에 지장이 되면 베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그때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옮겨 살렸다는 점이 놀랍고, 둘째는 심은 해를 세조 14년(1468) 이라고 했는데 누가 심은 것은 밝히지 않았다. 사실 누가 심었다는 나무는 전국적으로 많다. 그러나 연도를 특정한 나무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심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왜 적어 놓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또 은행나무는 씨가 떨어져 스스로 자라는 경우가 드물고 누군가 심어야 하는 데 비해 유학(儒學)을 상징하는 나무로 향교나. 서원, 재실 등에 심는데 상동에 그런 시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구본욱 박사가 보내온 <경상감영의 대구 설치과정과 그 시기, 2020, 계명대학교>의 논문을 보니 경상감영이 이전되어 온 날짜를 『모당일기 (저자 손처눌)』를 통해 1601년 5월 24일(양력 6월 24)임을 밝혀 크게 기뻤던 한편,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종조부 손제운(孫霽雲)이 경영하던 정자 제광정(霽光亭)이 상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구 박사에게 전화해 범어네거리의 은행나무가 이 정자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그 후 일직 손씨 대구종회를 찾았더니 2008년 손정석(孫廷錫) 회장이 쓴 “노거수의 고향(부제 일직손씨 상동의 노거수 은행수)”이라는 자료집을 주었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세인(世人)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구 수성 상동은 일직 손씨가 중묘(中廟, 조선 11대 왕 중종) 중엽 밀양에서 이거 정착한 고장으로 역사가 장구한 집성촌이었다. 손씨가 자고로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문화 교육 면에서는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사료 되며 또한 자연을 숭상하고 애호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고장 형성 과정과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 해 온 것이다. 이 고장 수성은 광활한 들을 적셔 농산물이 풍성하게 생산되고 -----이러한 천혜의 고장을 택하여 세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참봉 공 휘 ‘세경(世經)’ 조(祖)께서 선견지명이 계셨다 하겠다. ----우리 선조께서 입대구(入大邱)와 근사한 시기에 심은 것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은행수(銀杏樹) 한 그루----현 위치 범어네거리로 옮겨왔다. 이 노거수는 여기서 시민의 정성과 당국의 적극적인 보호로 갱생(更生) 회생하고 있으며 노수체(老樹體) 사이사이에서 새순(筍)이 나와 지금은 옛날의 그 웅장한 자태를 되찾아 가고 있다. 원하건 데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위용이 우리 시민 앞에 항상 서 있어 주기를 기원 합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일직 손씨는 밀양에서 세경이 상동에 터를 잡고 범어네거리 은행나무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입향조 세경이 심은 것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부득이 옮겨 심었지만, 시민의 사랑을 받아 잘 자라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즉 일직 손문의 유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대구시민의 날을 종전의 10월 8일에서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취지서를 발표날로 2030년에 들어와 새로 바꾼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운동이 서상돈 등 지역의 선각자들이 주도한 자랑스러운 국권회복운동을 폄하(貶下)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민의 날이라면 말이 시사하듯 전 시민이 함께 즐기고 기려야 하는데 이즈음은 너무 추울 때라 야외활동 등이 불편하다. 반면에 대구가 우리나라 3대 도시로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고 영남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감영을 설치한 날을 시민의 날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구 박사의 연구 결과를 존중하며 대구 발전의 초석이 된 감영 이전 날 자를 특정한 것도 반가웠지만, 덤으로 범어네거리의 은행나무가 일직 손문의 대구 입향조 손세경(孫世經)이 심은 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를 획득한 것도 그 못지않게 좋았다.
그러나 세경의 출생 연도가 1479년(성종 10)이고 종회장의 글처럼 대구로 온 때가 중묘(中廟) 중엽이라면 세경 공의 나이는 46세 정도가 맞다. 따라서 보존위원회가 빗돌에 써 놓은 1468년(세조 14)이 아니라 1525년( 중종 20)으로 보아야 한다.
은행나무의 정령 감응일까. 일직 손문은 이후 대구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임란 의병장이자 대구 십현의 한 분이며 교육자인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도 그중 한 분이지만 봉산서원에 배향된 문탄(聞灘) 손린(孫遴)과 더불어 아들 처신(處愼), 손자 단(湍) 3대가 연이어 대과에 급제해 가문을 빛냈다. 조선 시대 대구의 문과 급제자 총 38명 (현풍, 칠곡, 안심 제외)을 감안하면 대단하다 하겠다. 이식하기 전까지 마지막 은행나무 소유자 역시 일직인 손중괴(孫重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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