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영주 금성단 압각수(鴨脚樹)

이정웅 2020. 11. 19. 15:49

순흥부와 함께한 충절의 나무 압각수

비공인 국내 최고령 압각수 줄기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회생된 이름모르는 의사들를 기리는 금성단사들를 기리는 금성단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영주 금성단 압각수(鴨脚樹)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사사(賜死)된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李甫欽), 그외 이름 모를 희생자를 기리는 금성단(경북도 기념물 제491) 서쪽 언덕에는 비공인 국내 최고령(공인 국내 최고령은 수령 1,000년의 용문사 은행나무)은행나무보다 200년이나 더 오래된 1,200년 된 은행나무 2그루 일명 압각수(鴨脚樹)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고령일 뿐 아니라, 나무에 대한 내력이 조덕상(趙德常) 부사의 <흥주고부은행기(興州古府銀杏記)>에 의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특이한 나무이다.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자, 금성대군은 조카 단종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경기도 삭녕으로, 광주로 유배되었다가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때 순흥 부사는 대구 군수로 우리나라에서 민간 구휼(救恤) 기관의 효시인 사창(社倉)을 맨 처음 시행한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 이었다. 금성대군과 이 부사의 거사는 세조가 이미 왕위를 승계했고 사육신 등이 처형된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일 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해 본인들은 물론 많은 순흥 선비들이 희생되어 죽계천을 피로 물들이고 30여 리를 흘러 멈추니 아직도 안정면 1리는 피끝마을로 불린다. 조 부사의 기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전략) 공자 사당에 있는 고목 회()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고 한나라 정원에 말라빠진 버드나무가 다시 살아난 것을 사람들은 덜어 의심하여 기이한 일이라고 여긴다. 영남의 흥주부(興州府, 順興)는 본래 죽계(竹溪) 가에 있었다. 영귀봉 서쪽에 한 그루 은행나무가 있어 언제 심었으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온 고을 사람들이 함께 소중히 보호해 온 지 오래다. 경태 정축(1457)년 대전 이보흠이 단종의 옛 신하로 순흥 부사가 되었더니 금성대군이 이 고을에 귀양 와서 함께 충의 하기로 격려하고 금가락지를 주며 천명과 인심이 이미 세조에게 쏠렸다고 이르지 말고 반드시 옛 임금을 위하여 한번 죽어 육신(六臣)이 남긴 의열을 계승함으로써 기강을 만세에 세우자고 했다. 아침에 격서(檄書)가 풍기 땅에서 새어나가 세조의 군사가 저녁에 죽령을 넘자 한 고을의 개, 닭이며 초목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30리에 이르기까지 피흐름 속에 들게 되었다.

이 무렵 은행나무가 절로 말라 죽었으니 산천도 슬픈 빛을 띠고 천지도 온통 원통한 기운에 잠겼으며 길가는 나그네도 폐허를 지나면서 마음 아파했고 마을 아이들도 나무를 안고 울었다. 감히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으나 바람에 상하고 들불에 타버려 껍질은 벗겨지고 속은 비어 남은 것은 다만 두어 길 밑둥 뿐이었다. 일찍이 어느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르기를 흥주가 폐해지면 은행나무가 죽고 은행나무가 살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고 했다.

고을 백성들이 그 말에 감격해서 전송해온 것이 대개 227년이었다. 숙종 신유(1681)년 봄에 비로소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3년 뒤인 계해(1684)년에 과연 흥주부를 회복한다는 명이 내렸으니 지금부터 70여 년 전의 일이기에 줄기는 늙고 가지는 자라 완연히 한 큰 나무가 되었다.

! 이상한지고 충신이 나란히 죽던 날 큰 나무가 따라서 마르더니 악운이 다하고 밝은 기운이 트이려 하매 썩은 밑둥이 먼저 살아나니 이른바 극히 은미(隱微)해서 보기 어려운 것이 이치요 극히 광대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 기인가 보다. 초목은 지각이 없으나 영고성쇠는 때가 있고 고을의 흥폐(興廢)에 뜨거운 이로움이 드러나니 하늘의 도에 소장의 운이 있음인가 사람의 일에 굴신의 명이 있음인가. 은행나무 아래 단을 설치해서 금성대군, 이대전 및 함께 난리에 순사(殉死)한 이들을 제사하라는 나라의 명이니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교화를 수립했던 훌륭한 규범은 앞으로 숙종의 흥주를 회복하라는 성대한 일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즉 두 분의 빛나는 영혼은 은행나무의 생생한 기운과 함께 길이 살아 꺼지지 않음이런가. 거듭 감탄하노라 때는 또 한 정축(1757)6월 상한이다. ”

 

이 기문은 조 부사가 은행나무에 대한 전해 들은 것은 물론 그동안 순흥에 있었던 사실까지 소상하게 기록했다. 공교로운 것은 그가 기문을 쓴 날이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순흥 선비들이 화를 입은 해 즉 14575 주갑(周甲)이 되는 같은 정축년 1757년이라는 점이다. 영주시의 시목(市木)을 이 은행나무에 연원을 두고 정했는지 알 수 없으나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기념물이나 천연기념물로 품격을 높이고 금성단과 아울러 일대에 수백, 수천 그루의 은행나무 숲을 조성한다면 가을철 국내 최대의 황금색 은행나무 단풍이 될 것이다. 암나무라 가지가 휘어지도록 여는 열매를 따서 묘를 생산한다면 선대가 물려 준 유산을 대를 이어 보존하는 양속(良俗)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