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광산김씨 예안파 오천유적지 느티나무

이정웅 2020. 8. 11. 14:13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오천리에서 어린 묘를 가져와서 심은 느티나무

 

군자리 문화유적지
느티나무 표석
탁청정

광산김씨 예안파 오천유적지 느티나무

 

 

 

안동시 와룡면에 <오천유적지>가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2~1534)가 터를 잡아 20600여 년을 세거해 온 오천리 외내 마을이 안동댐 건설(1974)로 수몰되자 마을 전체를 그대로 이전하여 보존해오고 있는 곳이다.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오천의 선비들은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을 남겨 세칭 군자리로도 불렸던 곳이었다.

이 유적지 한복판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고, 문중 유물관 숭원각에는 칠군자를 비롯하여 이 가문 출신 인물들이 남긴 고서(古書), 문집류, 교지(敎旨), 호적, 토지문서, 노비문서, 분재문서(分財文書), 각종 서간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고문서 7429(보물, 1018)과 전적(典籍) 1361(보물, 1019)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살림집과 정자 등 건축물 즉 탁청정(국가민속문화재 제226), 후조당(국가민속문화재 제227), 탁청정공파종택(국가 민속문화재 제제272) 등 최상급의 국가 문화재와 재사 및 사당(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 후조당 유물(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4) 등 지방문화재가 있어 사족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광김(光金)이 수몰될 때 가져온 것은 문화재뿐만 아니었다. 마을을 지켜주던 느티나무의 어린 묘()도 있었다. 현재 50여 년이 된 느티나무 밑 표석에는 후손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고 김용직 박사가 해와 달, 별자리를 겨냥하자라는 큰 제목에 군자리 상징수 느티나무에 부쳐라는 소제목의 비문이 있다.

 

이 자리에 선 사람들아 고개를 들자 그리고 바라보라, 이 나무는 나무이면서 역사이며 정신이다. 그 아기 무렵에 이 나무는 광김 반 천년 세거의 땅인 외내에서 태어나 우리 고장에 창상(滄桑)의 변이 있자 창황한 이삿짐 갈피에 담겨 여기에 식수 되었다. 본래 이 나무의 족속인 느티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경천숭조의 상징으로 삼아 오신 것. 오랜 세월 우리 할아버님과 할머님들은 이 나무와 더불어 조상을 받들고 아들딸 기르며 산천초목 천지 만물을 가꾸고 섬기는 나날을 살아오셨다.

우리는 그런 옛 분들의 핏줄이며 줄기요, 가지이며 잎새일 따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새삼 이 나무 앞에서 옛일을 되새기며 새날을 열려는 뜻을 세워야 한다. 여기 선 이 느티나무처럼 든든하게 뿌리를 대지에 뻗고 끊임없이 하늘을 우러러 해와 달 별자리를 겨냥하는 기상과 슬기를 익히고 다져나가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명목(名木)을 보았지만, 선조의 애환이 얽힌 나무를 옮겨 온 사례는 몇 곳 있으나 이렇게 빗돌을 세우고 그 의미를 소상하게 적어 새로운 곳에서 대를 이어 조상의 얼을 이어가자는 간곡한 메시지를 담은 비문은 처음 보았다. 예안파 광김을 명문의 반열에 올린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면면의 대강(大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1512~1584) : 1549(명종 4) 퇴계에게 글을 배웠으나 무과에 급제한 후 낙안군수·호조정랑·창성부사·이조좌랑·경상좌도 병마절도사·첨지 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산남집(山南集)이 있다.

 

둘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 : 가학을 계승한 뒤에 퇴계를 찾아 도학에 심취했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 번이나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심경문목(心經問目)이 있다. 문순(文純)의 시호를 받았으며 1822(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셋째,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1523~1566) :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558(명종 13) 생원 시에 합격하였다. 퇴계로부터 학문에 대한 뜻이 돈독하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품은 뜻과 행실이 있었는데 일찍 죽자 퇴계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위한 애도 시를 지었다.

 

넷째,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 : 후조당의 아우이다. 형보다 앞서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닦는 가운데서도 생각과 행동이 성현의 법도에 맞으니 퇴계가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역동서원을 창설할 때, 산장(山長)을 맡았다.

 

다섯째,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 : 퇴계의 문인으로 1555(명종 10) 사마시에 합격, 1572(선조 5)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에 전라도 동복현감으로 향교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 8백여 책을 구입하여 교육 진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또 학령(學令)을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家産)을 털어 향병(鄕兵)을 도왔고, 봉화 현감이 도망가자 가현감(假縣監)이 되어 선무에 힘썼다. 저서로 설월당집(雪月堂集)이 있다.

 

여섯째,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1526~1596) :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4(선조 7) 행의(行義)가 조정에 알려져 집경전참봉, 창릉의 참봉, 왕자사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587년 하양현감으로 나아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저서로는 일휴집(日休集)이 있다.

 

일곱째 :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1540~1616) : 일휴당의 아우로 1570(선조 3) 사마시에 합격, 좌찬성 정탁 등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부봉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영춘, 제천 현감 등을 역임하고 1600년 의흥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류성룡과 조목의 요청에 따라 사직하고 퇴계선생문집간행실무자로 참여하였다. 현직일 때에는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고, 퇴관(退官)해서는 후진교육에 전력해 큰 성과가 있었다.

 

지면상 칠군자의 이력을 너무 간략하게 소개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이들 중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형제는 맏이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의 아들이고, 산남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월당 김부륜 삼 형제는 둘째 탁청정(濯淸亭) 김수(金綏, 1491~1555)의 아들이다, 봉화인 일휴당 금응협, 면진재 금응훈 형제는 예안훈도 금재(琴榟)의 아들이자 김효로의 외손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