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응와 이원조 선생과 만귀정 전나무

이정웅 2020. 9. 22. 16:10

포천구곡 제9곡홍개동에 있는 만산일폭루

 

 

 

 

공자가 심은 회(檜)나무를 빗대서 심은 전나무

응와 이원조 선생이 만년을 보낸 가야산 만귀정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그대로 두어도 무방한 뒤안에 만든 화계

포천구곡 제9곡홍개동에 있는 만산일폭루

후학들이 세운 흥학창선비

 

응와 이원조 선생과 만귀정 전나무

 

 

성주 포천 계곡의 만귀정도 한개마을과 함께 몇 번 가본 곳이다. 비록 방손(傍孫)이지만 성산 이문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늦게 보학(譜學)에 관심을 가지면서 여러 문중의 훌륭한 어르신을 접하고, 이끼 낀 와가(瓦家)의 종택과 재사. 누정(樓亭)을 보면서 응와(凝窩, 李源祚의 호, 1792~1871) 선조도 학문과 벼슬, 인품 면에서 어느 문중의 고명한 어르신에 못지않다는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성산 이가(李家)의 존재감을 응와 선조가 심어 준다.

독감보다 치사율이 낮고, 하루에 발생하는 교통사고 사망자나 자살자 수보다 적다는 통계가 있음에도 단지 전염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버스나 지하철도 탈 수 없고, 단체 여행도 불가하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갇혀 생활 한지 수개월이 된다. 따라서 친구들과 모임도 할 수 없고 도서관조차 문을 닫아 독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인으로서는 집에 들어앉아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일상이 너무 슬프다 못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든 어느 날 김상기 전 교감, 전보규 전 교육장, 박찬우 전 동성로번영회장과 함께 계곡이 좋고 공기(空氣) 맑은 성주 쪽으로 여행을 했다.

복원 중인 성주읍성, 성주이씨 시비(詩碑) 동산 등을 둘러보고 벽진에서 염소전골로 점심을 먹고, 추억박물관을 갔다가 포천 계곡으로 향해 만귀정(晩歸亭)에 도착했다. 이름이 시사하듯 조선 후기 공조판서를 역임한 응와 대감이 40여 년의 벼슬살이를 마치고 1851(철종 2) 공의 나이 60세에 귀향하여 산수가 빼어난 이곳에서 소위 포천구곡을 경영하며 독서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낸 곳이다.

날씨조차 쾌청해 여느 때 찾아왔을 때보다 주변 풍광이 더 수려해 보였고 시간도 넉넉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조경·녹지 분야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필자로서는 전에 보지 못했던 실재는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을 원림과 나무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바윗돌들을 그대로 두고 터를 닦아 자연 훼손을 최소화한 것도 인상 깊지만, 정자 뒤안도 주변이 모두 숲이라 그대로 두어도 무방할 것을 다듬어 화계(花階)를 만들고 나무를 심은 높은 심미안(審美眼)에 응와 선조의 차원 높은 조원관(造園觀)에 감탄을 절로 나왔다. 특히 정자 입구에서 바라볼 때 왼쪽 바위 모서리 좁은 공간에 줄기에 이끼가 끼고 꾸부정한 사철나무, 관리사 앞의 크기가 장대같이 높게 자란 회화나무, 더 특별한 것은 뒤안 오른쪽의 전나무였다.

3종류의 나무는 종 다양성이 높다는 가야산이지만 이곳에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라. 정자를 지으면서 일부러 심은 것들이다. 영천의 지산 조호익(曺好益) 종택의 대표 수종도 사철나무이고, 대구시 평광동 단양우씨 재사(齋舍) 첨모재의 대표 수종도 사철나무다. 절개와 지조를 큰 덕목으로 여겼던 조선의 선비들은 낙엽수보다 대나무나 소나무 등 늘 푸른 나무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런 나무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데 비해 사철나무는 당시 귀한 나무였다. 가야산에 흔하게 자라는 것은 소나무다. 그런데도 구태여 사철나무를 선택했다는 것은 당신이 있는 곳을 어느 곳보다 한 차원이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대성전이 있는 향교나 강학 기관인 서원 조경에 필수 수종인 회화나무 역시 가야산에 자라지 않는 나무다.

가장 특이한 것은 전나무이다. 가야산에 자생하는 나무인지 그렇지 않은지 나무인지 문헌을 살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해인사 일주문 입구에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자라고, 정상이 해발 1,430m 이자, 설행초, 산오이풀, 구상나무 등 팔공산이나 비슬산에 자라지 않는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어 자생할 가능성이 크다. 또 만귀정 담 밖에도 몇 그루 큰 나무들이 보이나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닌 것 같아 자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뒤안 화계의 한 그루는 일부러 심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전나무가 심긴 곳 중에서 일반 사가(私家)의 경우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고택의 것이 가장 크고 서원의 경우 한강 정구(鄭逑)를 기리는 회연서원에도 큰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에 나타나고, 현존하는 것으로는 남명 조식을 기리는 덕천서원의 것이 가장 컸다.

일두는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 중 한 분이고 정구(鄭逑)와 조식(曹植)은 모두 나라를 대표하는 큰 유학자다, 이렇게 유학자의 집이나 서원에 심는 이유는 공자(孔子) 수식(手植)의 회()나무에서 비롯된다. 곡부 공묘(孔廟)에는 공자가 심은 회나무가 아직 살아 있다. 빗돌에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라고 쓰여있다. 실제로 향나무인데 자전(字典)에서 전나무로 풀이하여 잘 못 알려졌으나 사실로 굳어졌다. 따라서 전나무를 심은 것은 회()나무로 상징되는 공자의 유학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만귀정의 전나무 역시 응와가 공자 학문의 계승자라는 입장을 천명한 증표 같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