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 류진이 터를 잡고 조선 후기 정승 류후조가 살던 수암종택
봉조하를 하는 류 정승의 녹봉을 관리하던 관리들의 숙소 녹사청
녹사청(錄事廳)이 있는 수암(修巖)종택의 무궁화
다소 외지다고 할 수 있는 상주 중동면 우물리에는 수암종택(경북도 민속문화재 제70호)이 있다. 인근 면에 태어나 가끔 찾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수암(修巖)이 조선의 4대 명재상 서애의 3남이며 후손 중 조선 후기 남인으로 유일하게 정승에 오른 낙파(洛波) 유후조(柳厚祚)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으며 그가 본향 하회를 두고 왜 이곳에 정착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할까. 이제 나이가 들어 고향에 애정을 가지면서 관련 인물과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다인 출신으로 은퇴 후 노모를 돌보기 위해 자주 고향을 찾는 김도상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낙단보에 유람선을 띄우는 데 추석 연휴 마지막 날까지는 무료라니 한번 타보자고 했다. 기대가 컸다. 일대는 넓은 수면이 예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고, 호수에 가득 찬 맑고 깨끗한 물을 보면 이 물을 대구시 상수원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왔었기 때문이다.
대구시가 몇 년 동안 시도하고 있는 해평 취수원이 구미시민의 반대로 성과가 없는 데 비해 의성 비안과 군위 소보에 통합 신공항 건설이 확정되어 그곳에 쓸 물의 수요도 감안(勘案)한다면 낙단보가 최적의 장소로 생각된다. 이런 상상을 하며 쾌히 승낙했다.
또 낙정나루는 고교 3년을 상주에 유학해 수없이 건너다녔던 곳이다. 그때에는 낙단교(洛丹橋)가 없어 버스를 탄 채로 배에 올라 사공이 젓는 노(櫓)만 의존해 강을 오갔고 나루터 부근에는 민물고기 횟집과 매운탕 집이 즐비했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동안(東岸) 중동면 우물리 토봉(兎峰) 기슭에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과 연담의 아들이자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낙서헌(洛西軒) 이항(李沆) 선조의 묘소가 있고 낙서헌의 별서(別墅) 한연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늘 먼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즉 합강(合江) 부근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1시간여의 주행(舟行)은 만감을 교차하게 했다. 넓은 수면, 티 한 점 없는 가을 하늘과 푸른 물빛, 강가에 우뚝 선 절벽 천인대(千仞臺). 호수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 등 내 고향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젊은 날 농사라고는 벼, 보리재배뿐이고, 교통이 불편하며 그 흔한 농공단지 하나 없는 고향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개발에 뒤처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진다. 유람을 마치고 수암종택을 찾았다. 김 박사로부터 종택에 대한 설명과 “낙동 대감”의 일화를 들었다. 낙동 대감은 앞서 말한 고종 조 좌의정을 지낸 낙파 유후조의 별칭이다. 종택의 안팎을 둘러보면서 사당 앞의 잘 자란 무궁화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조경수의 수종은 여느 고택과 비슷하나 무궁화는 다소 예외였다. 심은 장소도 입향조의 사당(祠堂) 앞이라 평범하게 심어진 나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어 의문으로 남겨두었다.
그 후 같은 직장에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도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오류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관수루, 마애사.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수암종택을 다시 찾았다. 행운이었던 것은 류창하(柳昌夏) 우천문중 대표를 만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으며 『우천400년(愚川400年), 2010』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첫 공직이 대구시청이라 친근감이 더했다. 무궁화에 대한 사연을 물었더니 11대 종손으로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 류우국(柳佑國)을 기리려고 심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적중했다.
수암은 37세 때인 1617년(광해군 9) 하회를 떠나 이곳을 개척했다. 아마 아버지 서애가 상주 목사를 지낸 구연(舊緣)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둘째 형 단(礻+耑)은 단밀현 생물리(현, 의성군 단밀면 생물리)에 터를 열어 서애의 아들 5형제 중 2분이 상주와 인연을 맺었다.
수암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종택의 동쪽 위천(渭川, 渭江 이라고도 함)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하회가 태극 모양의 연화부수형이라면 이곳은 태백, 속리, 팔공의 3개 산과 낙동강, 위천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정기가 모인 곳으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길지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시리(柴里), 시상촌(柴桑村)이었는데 수암이 가사리(佳士里)로 바꾸었다고 한다<상산지>. 시상촌은 도연명의 고향 율리(栗里)의 고을 이름인 바 그처럼 은거하거나, 가사(佳士)는 “품행(品行)이 단정하는 사람”<자전(字典)>을 뜻하는바 당신이 그런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보인다.
그 후 1700년대 중반 즉 영조 연간 현손 류성로(柳聖魯)가 우천(愚川)으로 옮겨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며 지금의 종택은 7대손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가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祖先)의 유업을 계승하려는 후손들의 노력과 명당의 지령(地靈)에 힘입어 우천세가(愚川世家)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니 관료로 청송 부사 류교조(柳敎祚), 양산 군수 류인목(柳寅睦), 자인 현감 류도석(柳道奭), 사헌부 지평 류진(柳袗), 단양 군수 류천지(柳千之), 돈녕부 도정 류심춘(柳尋春), 의정부 좌의정 류후조(柳厚祚) 등이며, 문집을 낸 사람은 류진(柳袗), 류심춘(柳尋春), 류후조(柳厚祚), 류주목(柳疇睦), 류흠목, 류후목 등 7명이고, 유고를 남긴 분이 류천지, 류명하, 류성림, 류회춘, 4명이며 독립지사 류우국, 류원우 2명 등이다.
종택의 녹사청(錄事廳)은 보기 드문 조선 시대 공무원 보수제도의 유산으로 낙파(洛波)가 좌의정에서 물러나서 받은 봉조하(奉朝賀,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로 종신토록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의식에만 참여함)의 현물 급료를 담당하는 관리가 머무르던 희귀한 건물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수암과 후손들이 소요(逍遙)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봉황대는 잡초에 묻혀있고 관란정, 송암정, 독송정, 합강정, 위천서재, 석죽서실, 계당정사 등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다.
현재 일대는 낙단보와 유람선운행으로 풍광이 더 수려해졌고 접근성도 좋아졌다. 종택을 중심으로 가능한 몇 곳의 정자를 복원하고 절경이 잘 보이도록 둘레를 걸을 수 있는 탐방로, 자전거길, 전망대 등을 만든다면 적어도 경관적으로는 하회(河回) 못지않은 명소가 될 것이다. 상주시가 종합적으로 검토 주었으면 좋겠다.
종택 부근 낙동강의 천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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