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이 낮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의 많은 기초단체가 소멸 위기에 놓여있다. 경상북도 의성군도 그중 한 곳이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가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출산을 장려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귀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의성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귀농을 장려하면서 내건 구호가 “하늘이 숨겨둔 땅 의성(?)”이라고 하여 귀농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으로 보이고 토박이들에게는 은근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18개 읍면 모두 하늘이 숨겨둔 땅이겠지만 군의 서단에 있는 단밀면은 더 특별한 곳이다.
팔공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가신, 유학산, 청화산을 거쳐 단밀의 주산 만경산에서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앉은 곳이기도 하지만 동, 북을 위천이 감싸 흐르며 기름진 평야는 명품 “안계쌀”을 낳고, 낙동강이 면의 서쪽을 흘러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소외(?)되어 오히려 자연환경이 잘 보전된 곳이다.
단밀은 역사 또한 뿌리 깊은 곳이다. 일찍이 삼한 시대 진한 12개국의 하나인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의 도읍지요. 삼국시대 신라 민중음악과 무용 즉 미지악(美知樂)과 미지무(美知舞)의 발상지이며 고려 태조가 호국 사찰 용암사를 창건한 곳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퇴재(退齋) 신우(申祐)가 수도 개경에서 내려와 은거한 곳이고 훗날 속수서원(涑水書院)으로 발전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선정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이 건립된 곳이다. 또, 효열각도 10여 개소로 전국 면 단위에서는 가장 많다.
더 특이한 일은 안동 하회가 본향인 명재상 류성룡의 둘째 아들 도암(道巖) 류단이 아버지 서애가 상주 목사 시절 점지해 둔 생물촌(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생물마을)에 입향한 점이다. 서애는 400여 년 전 단밀이 요즘 의성군이 말하는 ”하늘이 숨겨 놓은 땅“이었음 알았던 것 같다. 상주시 중동면의 아우 수암종택과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도암은 1580년(선조 13) 상주목 관저에서 태어났다. 6, 7세에 학문을 접하는 태도가 남달라 서애의 기대가 컸다.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3세에 임란을 맞았다. 정유재란 시 망우당 곽재우가 버티고 있던 화왕산전투에 참여했으며 1607년(선조 40) 아버지 서애가 돌아가시자 가례에 따라 장자 지냈다.
1609년( 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천거되었고 32세에 병산서원 초대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우 진이 서해역모(西海逆謀)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생활을 할 때 함께 따라가서 석방을 위해 노력하다가 병을 얻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의 주선으로 재신(宰臣)의 주치의까지 동원해 치료하였으나 1612년(광해군 4) 별세하니 33살이였다. 조정에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하고 사헌부 장령을 증직했다.
슬하에 딸만 있었으니 사위는 교관 박준이다. 양자로 수암의 둘째 아들 백지(百之, 1629~1684)를 들였다. 자는 자능(子能)이고, 호는 이송당(二松堂)이다.
조부 류성룡의 가풍을 이어받아 높은 학덕과 명망으로 추천되어 1679년(숙종 5)에 남별전참봉, 1681년(숙종 7) 자여도찰방이 되어 애민교화에 힘써 후에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1683년(숙종 9) 상서원 직장으로 있을 때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이송당(二松堂)”이라 자호(自號) 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였다. 문집으로 『이송당집(二松堂集)』이 있다.
장하(章河), 석하(錫河), 창하(昌河), 응하(應河) 등 4남 모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나라를 위해 순절한 후손이 이어졌으니 와서(瓦西) 진휘(進徽, 1814~1881)는 1840(헌종 6) 진사시에 합격, 고원군수를 지냈고, 도발(道發, 1832~1910)은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득고 식음을 전폐하여 순절했고, 큰아들 신영(臣榮, 1853~1919)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결해 각기 독립장과 애국장에 추서되고 진안 마이산 이산묘(餌山廟)에 배향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뒷바라지하고 있는 류영하 변호사도 후손이다.
도암이 발을 붙이고 살았던 생물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한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외진 마을이 서애의 아들 도암의 살던 곳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쓰레기 산 때문이었다. 국내 언론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곳을 미국의 CNN가 지구촌 곳곳에 알렸다. 현재 모두 치우고 그 자리에 기억의 숲 등 환경복원의 모범사례로 새롭게 정비하여 오명을 씻는다고 하니 그 역발상이 놀랍고 기대가 된다. 생물촌에는 이송당이 심고 자호로 삼은 소나무의 씨앗에서 싹이 돋아 대를 잇고 있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러나 표석 하나 없는 것이 아쉽다.
부근에는 도암류선생유허비와 안동의 영호루, 진주의 촉석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누각의 하나인 관수루, 4대강 정비사업 시 발굴된 마애보살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32호)과 선초에 활동했던 정무공(貞武公) 박호문(朴好問), 정숙공(貞肅公) 박안신의 묘 등 볼거리가 있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수하는 두물머리를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도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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