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답사지로 전북 완주를 택했다. 잘 정했다 싶은 마음에서 우산정사(紆山精舍)와 제촌지 일대를 추천했다. 우산정사는 선조 때 문신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 1556~1620)를 기리는 곳이고 제촌지와 그 부근은 그가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가져온 백련을 심은 못과 며느리 삭녕최씨가 시집올 때 변산에서 가져와서 뿌린 솔 씨가 세대를 거듭하며 자라 마을 주위의 푸른 솔밭이 지금도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코스로 선정되어 조금 불안했다 종종 있던 사례와 같이 다른 곳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 마지막 코스는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차를 탔다.
그런데 행운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소위 베스트 드라이버인 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두 번째 코스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너무 기뻤다. 첫 번째 코스인 잘 꾸며진 대아수목원을 관람하고 두 번째로 우산정사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는 백련 시배지를 포함한 넓은 저수지가 있고 안길이 넓으며 마을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과 더불어 풍광이 너무 좋았다.
“공은 본관이 진천(鎭川)으로 아호는 표옹(瓢翁) 또는 백련거사(白蓮居士)이다. 아버지는 송영이고 어머니는 하세준의 딸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문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3년 도체찰사 송강 정철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성절사의 서장관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주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 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의정부 사인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 목사가 되었으나, 권력자 정인홍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시강원 필선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11년~1612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했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 되었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부 첨삭)
이상에서 보듯이 표옹은 목민관으로서도 존경받았지만, 문익점처럼 백련을 처음 조선에 도입한 조경가로의 업적도 크다, 그러나 그를 더욱 빛나게 한 또 다른 미담은 중국의 문장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주지번(朱之蕃)과의 인연으로 우리 외교를 빛나게 한 점이다.
표옹이 송강(松江)을 따라 중국에 가서 객사에 묵을 때 허름한 차림의 청년이 부엌에서 불을 때며 무언가 읊조리는 데 들어보니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 이었다.
“너는 누구이기에 그 어려운 남화경을 외우는가?” 하였더니 “저는 남월(南越) 출신으로 과거를 보러 몇 년 전에 올라왔는데 여러 번 낙방하다 보니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이런 궂은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포옹은 답안지 작성요령과 가지고 있던 서적, 돈까지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1595년 그 청년은 중원의 많은 인재를 물리치고 장원급제하여 중국의 명사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신종의 손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절단 대표로 조선을 오게 되었다. 천자의 나라 사신이라 하여 거들먹거리며 뇌물을 요구하던 종전의 사신들과 달리 너그럽고 부드러웠다.
공무를 마친 그가 표옹을 만나러 나섰다. 전주 객사에 들러 풍패지관(豐沛之館) 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 주었다. 풍패(豊沛)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의 고향으로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을 빗댄 말이다.
이어 청풍군수 임기를 마치고 낙향해 있던 51세의 표옹과 13년 만에 감격스럽게 재회했다. 80권의 서적을 스승 표옹에게 선물하고 “멀리서 스승을 추모하고 있다”며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을 써 주고 묘(墓) 쓸 자리도 잡아 주었다.
강릉 경포대의 제일강산(第一江山)도 그의 글씨고, 성균관(成均館)의 한석봉 편액 글씨를 극찬하며 떼어가는 대신 그가 쓴 것이 지금 남아있다. 늘 멸시(?)받던 조선을 표옹의 선행으로 감격 시켜 국격을 높였다. 꽃 피는 시절 다시 찾아 백련의 향기를 맛볼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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