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선생의 밤나무 예찬론

이정웅 2024. 6. 8. 10:52

담암 백문보를 기리는 영덕 운산서원

 

밤꽃

 

알밤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선생의 밤나무 예찬론

 

 

대흥백씨(大興白氏) 영덕군 영해 입향조이자 여말(麗末) 정당 문학 등 고위관직을 지낸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03~1374)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며 허송세월하는 다수 사람과 달리 공백 기간에도 자기를 갈고닦아 기회가 주어졌을 때 크게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크게 공헌한 삶의 자세가 동료 윤택(尹澤)이 좋아하는 밤나무에 빗대 율정설(栗亭說)을 지어 소위 밤나무 예찬론을 펼쳤다.

 

(尹澤, 1289~1370 고려 후기 문신) 상군(相君, 재상)이 처음에 곤강(坤岡)의 남쪽에 집터를 마련했다. 집의 동편과 서편에 밤나무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거기에 정자를 짓고 율정(栗亭)이라고 이름했다. 그 후에 또 조금 서편으로 가서 새로 집을 샀는데 밤나무 숲이 더욱 무성했다. 성안에 있는 집에는 밤나무를 심는 사람이 적은데 윤공(尹公)은 집을 구할 때마다 밤나무 있는 곳을 선택했다. 그는 일찍이 나에게 말했다.

봄에는 잎이 무성하지 않아 가지 사이가 성글어서 그 사이로 꽃이 서로 비치고, 여름이면 우거져 그늘에서 놀 수 있으며, 가을에는 밤이 먹을 만하며 겨울이면 밤송이를 모아 아궁이에 불을 땔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나무를 좋아한다.

나는 말한다. 불이 마른 것에 잘 붙고,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는 것은 성질이 같은 것끼리 서로 찾아가는 것이니 이치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대개 숭상하는 것이 같으면 물건이나 내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한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와 싹과 열매가 어렵게 되는 것, 쉽게 되는 것, 일찍 되는 것, 늦게 되는 것 등 가지각색인데 오직 이 밤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가장 늦게 나며, 재배하기도 어렵고, 기르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자라기만 하면 쉽게 튼튼해지며 잎이 늦게 돋기만 하면 곧 그늘을 쉽게 만들어 준다. 꽃이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곧 흐드러지며, 열매를 늦게 맺지만 맺히기만 하면 곧 수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밤나무는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차고, 이지러지고, 줄어들고, 보태는 이치를 함께 가지고 있다. 윤공은 나와 같이 과거에 합격(1320, 충숙왕 7= 필자)했는데 그때의 나이가 30여 세였다. 그러다가 나이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늦었다고 하였으나 공은 직무에 더욱 조심하며 충실했다. 그러다가 임금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는데 하루 동안에 아홉 번 자리를 옮겨 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별로 손질하지 않았는데도 무성하게 뻗은 밤나무와 같다. 그 기틀을 세우는 것이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그 성취하는 것이 뒤에는 쉬웠으니 이것은 밤나무의 꽃과 열매의 성질과 같은 바가 있다.

나는 그것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한다. 대개 식물의 씨앗이 흙에서 싹틀 때 깊으면 더디 터진다. 꼬투리가 터지면 곧 눈이 트고, 눈이 트면 가지가 생겨서 반드시 줄기를 이룬다. 샘물이 웅덩이에 차게 되면 조금씩 흘러나오게 된다. 그 흐르는 것이 멈추게 되면 물이 고이고, 고이면 못이 되었다가 반드시 바다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므로 그 느린 것은 장차 빨리 되려는 것이요, 멈추는 것은 장차 끝까지 도달하려는 것이니 곧 모자라는 것을 채울 수 있으며 부족한 것은 보탤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도 이것을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사람이 숭상하는 바를 관찰하건 데 곧 불을 숭상하면 불을 닮고 물을 숭상하면 물을 닮으니 나와 숭상하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그대가 출세하여 영화롭게 된 것은 밤나무의 생장함과 같으며 밤을 수확하여 간직함은 그대의 은퇴하는 것과 같다. 그 생장함에는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바가 있으며 그 간직함에는 양생의 작용이 있다. 이에 나는 이 정자에 대하여 글을 짓는다.”

이상이 담암의 율정설 전문이다. 즉 윤택(尹澤)30대에 벼슬길에 오른 동료들과 달리 늦은 나이인 40에 나아갔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한 결과 임금의 인정을 받아 하루 동안에 아홉 차례나 승진해 마침내 대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잎이 늦게 나오지만, 곧이어 푸른 잎을 내 그늘을 만들고 늦게 꽃이 피지만 빨리 충실한 열매를 맺는 밤나무의 자람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 논어나 맹자 등 요즘 말로 인문학을 공부한 담암이 매화 난, 국화, 대나무 등 선비들에게 사랑받는 사군자와 달리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밤나무를 이처럼 세밀하게 관찰한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이 예찬론에도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으니 선조들이 밤나무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즉 조율이시(棗栗梨柿)의 율()이다. 대추, , 감과 함께 제사상에 올리는 필수 과실로 밤을 선택한 지혜를 간과한 점이다. 많은 괴실 중 하필 4종을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개 대추는 많은 열매가 열리는 습성처럼 후손을 많이 두라는 뜻이고, 밤은 싹이 터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밤톨이 썩지 않고 영양분을 제공하듯 조상의 보살핌을 잊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는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뜻을 담고 있으며, 배는 6개의 씨앗이 상징하는 여섯 판서처럼 높은 벼슬을 하라는 뜻이며, 감은 뿌리를 깊이 뻗는 감나무처럼 온갖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말고 심지(心志)를 굳게 세워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일화로 봄에 결혼식을 올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은 6월에 하는 데 이를 “6월의 신부. June Bride”라고 한다고 한다. 이때는 밤꽃이 피어 진한 향기가 신부의 성욕을 자극하여 출산율이 높다는 속설에 기인한다고 한다. 저출산으로 큰 걱정인 우리나라도 참고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