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박물관 야외 전시장 내 이승만 대통령 나무
8년 전, 즉 2016년 9월 일행과 더불어 거창 수승대 일원을 답사 하러 나셨다. 첫 방문지는 군 단위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웠다는 거창박물관이었다. 대구가 덩치만 크지 시립박물관 하나 없는 실정을 생각하면 작은 도시 거창군민이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 하는 거창사람보다 대구 사람이 못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현장이다.
채색본 대동여지도와 고려시대 그려진 둔마리 고분 벽화 등을 둘러보고 야외 전시장으로 갔다. 그곳의 한 느티나무 앞에 “1950년 리승만 초대 대통령이 파종, 육묘하여 나누어진 나무‘라고 쓰인 표석을 발견했다.
전국의 명목이나 노거수를 찾아다니며 스토리텔링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글감이었다. 그러나 쓰인 몇 줄만으로는 이야기를 풀어 갈 수가 없어 묵혀두고 있었다. 특히, 나랏일로 바쁜 대통령이 묘목을 키웠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얻어 온 해가 1950년이라고 하니 그해는 한국전쟁으로 국가 존망이 불투명한 때였는데 경남 서부 외진 거창에 어떤 연유로 어떻게 묘목이 전달되었는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7월 영남일보 신간 소개란에 박상진 경북대 명예 교수가 『궁궐의 고목 나무 (2024,눌와)』를 발간했다는 기사를 보고 축하 문자를 보냈더니 얼마 후 고맙다는 답신과 함께 신작과 더불어 박 교수가 집필하고 문화재청이 펴낸 『대통령, 청와대에 나무를 심다』 라는 책을 동봉해 왔다.
그 책에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1948, 7, 22) 이듬해 즉 1949년 식목일을 맞아 “애국 애족 정신으로 나무를 애호하자”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나무 심기를 독려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4월 12일 자 담화문을 통해
“내가 사는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 문 앞에 큰 느티나무 2그루가 서 있는데 거기서 씨가 떨어져서 솟아난 것이 혹은 한두 척(尺) 되는 것도 있고 또 혹은 사람의 길에 넘는 것도 있어서 대략 2 백주 가량(假量) 캐낼 수 있다. 내가 여기 특별히 서울 시내 동포들에게 알려주려 하는 것은 이 며칠 안으로 이 나무를 캐다 심어 보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정학 경무대 경찰서장을 찾아서 물으면 나무를 몇 주 주든지 캐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큰 나무를 심어 길러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 말고 와서 요청하기를 바라며 이런 나무를 심은 후에는 모든 사람이 보호하기에 힘써야 될 것이다.”라 했다고 한다.
이 담화 이후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느티나무 묘목 분양 요청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이어 이 대통령은 4.19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4월 9일에도 경무대에서 손수 가꾼 단풍나무 3만 그루를 각 기관을 통해 전국에 나눠주었다고 한다. 박 교수의 글을 보면 거창군의 나무도 1950년이 아니라, 1954년에 가져왔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새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다시 거창을 찾았다. 우선 8년이나 지났으니 나무가 아직도 살아있는지 궁금하고, 거창문화원을 방문하여 혹시나 이 역사(役事)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볼 작정이었다.
대구에서 거창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월요일이라 공원 등 전국의 공공시설이 휴관하는 날이라는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박물관에 전화를 걸었더니 받는 분의 답이 역시 휴관이라고 했다.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조금 더 큰 것 이외 모습은 여전했다. 사진을 찍고 거창문화원을 찾았더니 향토사연구소 박노해 부소장이 비교적 자세히 알려 주었다. 이어 박물관 구본룡 관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구 박물관장은 자기도 내력이 궁금했는 데 좋은 자료를 얻었다고 박 교수의 책을 보고 내용을 보강해 표지석을 새로 만들겠다고 했다.
박 부소장에 의하면 나무를 분양(分讓)받은 분은 최남식(崔南植, 1920~2007)씨로 당시 거창군청에 근무했다고 한다. 3그루를 가져와서 군청 뒤뜰에 심었는데 1 그루는 죽고 2그루가 남았다. 그마저 이전해야 할 처지가 되어 1그루는 최 선생 즉 자기 농정에, 다른 1그루는 신원지서와 신원면사무소 사이로 이식했다고 한다. 현재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 나무는 농장에 있던 나무를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1987년 옮겨 심었다고 한다. 최 선생은 이외에도 거창박물관 건립 운동을 주도하면서 소장 유물 500여 점을 기증하고, 거창 특산물인 거창사과 탄생의 주역이었다고 한다.
거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불과 1미터 남짓한 느티나무 묘목을 멀고 먼 경무대에서 가져온 최 선생의 욕심(?)도 대단하지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버려져 있다시피 한 느티나무 유목(幼木)이 아까워 국민께 나눠주어 우리 강산을 푸르게 하려고 했다는 또 다른 모습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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