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응와종택(凝窩宗宅)의 탱자나무

이정웅 2024. 6. 16. 16:24

종손(오른쪽)과 필자
응와대감이 셋째 아들 귀상에게 준 귤나무 대목 탱자나무
탱자나무와 표지판
응와 종택 사랑채(경북민속문화유산)

 

 

응와종택(凝窩宗宅)의 탱자나무

 

 

 

몇 년 전 조선 후기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 대감의 종택을 지키고 있는 종손(이수학)을 만났더니 대구수목원 책임자를 지냈다는 자네는 어찌하여 종택에 나무 한 그루 심어 주지않는가하여 깜짝 놀랐다.

종택(경북민속문화유산)은 한개 마을(국가민속문화유산)의 다른 집과 달리 넓은 잔디밭과 잘 가꾼 화단에 수십 종의 나무와 화초가 자라고 있어 사계절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더 심을 공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충격이 컸다.

그래서 어떤 나무를 심는 것이 종가의 품격에 맞을 것인지? 또 기존에 심어 져 있는 나무와 같은 나무를 심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언뜻 교리댁(경북민속문화유산)의 탱자나무가 떠 올랐다. 이나무는 응와가 제주 목사로 있을 때 귤나무 3그루를 3형제에게 각기 한 그루씩 선물한 나무다.

그러나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첫째 정상(鼎相 1808~1869),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에 제수된 둘째 기상(驥相, 1829~1903)에게 준 것은 죽고 문과에 장원하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셋째 귀상(龜相, 1829~1890) 것만은 줄기는 동해(凍害)를 입어 죽었으나 대목(臺木)으로 사용한 탱자나무는 싹이 돋아 180여 년 동안 노란 열매를 맺고 있다.

말하자면 응와의 부성애(父性愛)가 깃든 나무로 한국판 남귤북지(南橘北枳)”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강남처럼 따뜻한 제주도와 달리, 성주는 겨울에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아 귤나무가 자랄 수 없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대목 탱자나무만 싹이 돋아 자란 것이다.

그러나 이 고사(故事)는 과학적으로는 맞지않다. 즉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로 변하지 않는다. 귤과 탱자는 종()이 서로 다르다. 다만 추운 지방에서는 생육이 나빠 귤의 모양이 작거나 맛이 쓰거나 떫은 등 다를 수 있으나 귤나무가 탱자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탱자는 가시가 있어 관상 가치가 떨어지는 나무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교리댁의 탱자나무를 선택한 것은 응와의 자식 사랑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응와가 처음 도착한 제주도는 육지와 풍경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특히, 주렁주렁 열린 귤은 매우 이국적이어서 제주의 여러 특산물 중에서 가장 먼저 자식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응와가 3형제에게 보낸 귤나무가 죽었더라도 대목에서 싹이 튼 이 탱자나무에는 자식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나무다.

이 나무를 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손에게 비췄더니 좋다고 했다. 2022년 가을 교리 댁에 가서 종자를 주워 왔다. 화분에 담아 베란다에 두었더니 다행히 이듬해 싹이 돋았다. 한 해 동안 한 뼘쯤 자랐다. 드디어 2024513일 조카 우영이 차로 묘()를 가지고 한개마을로 갔다.

크기는 작으나 의미가 남다른 나무이기에 반가워했다. 종택의 상징인 북비고택(北扉古宅) 안마당에 심고 물을 주었다. 혹시 하잘것없어 보이는 탱자나무를 왜 심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응와 이원조 대감이 제주 목사 시절 아들 3형제에게 선물로 준 귤나무의 대목 탱자나무 2세로 응와 선생의 자애로움이 살아있는 나무입니다라고 쓴 팻말을 세웠다.

그런데 올해 내 나이 80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40에 나무를 심으며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물다고 했는데 언제 나무가 자라 그늘을 볼 것인가하였고, 서애(西厓) 유성용은 62세에 소나무를 심으며 내 비록 그늘을 보지 못해도 천년이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 되리라하였다. 특히, 영조 때의 문신 황흠(黃欽)8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낼 때, 종을 시켜 밤나무를 심게 했더니 이웃 사람이 웃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황흠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런 걸세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해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그랬더니 10년 뒤에도 황흠은 건강했고, 그때 심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리니 이웃을 불러 말했다.

자네 이 밤 맛 좀 보게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날 위한 것이 되어 버렸군.” 하였다고 한다. 비록 황흠과 같이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성산 이문의 자랑인 응와 종택에 그것도 80에 조그마한 흔적을 남겨 기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