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무용극 “사도성(沙道城)의 이야기” 발상지 괴시마을

이정웅 2024. 5. 1. 17:31

목은 이색선생 상
괴시마을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마을 앞 회화나무 앞의 것은 팽나무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 공연사진(출처, 연합뉴스) 2011, 평양대극장

 

무용극 사도성(沙道城)의 이야기발상지 괴시마을

 

 

 

명문 영양남씨 집성촌(국가민속 문화유산)이자 고려 삼은(三隱)의 한사람인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태어난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에 대하여 문화재청의 홈페이지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영덕 괴시마을은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이 태어난 마을로, 함창김씨 (목은 선생의 외가)가 처음 터를 잡은 이후 조선 인조 대(1630년 무렵) 영양남씨가 정착하면서 남씨 집성촌이 되었으며, 경북 북부 해안지방에서 현재까지 단일 문중의 역사와 문화가 전승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반촌임.

마을의 원래 명칭은 근처에 늪이 많고 연못이 있어 호지촌(濠池村)으로 불렸으나, 목은 이색이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 중국 원나라 학자 구양박사(歐陽博士)의 마을인 괴시(槐市)’와 비슷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괴시(槐市)’라고 고쳐 불렀다고 함. (출처: 1796년 영해 지군사(知郡事) 황은이 목은 이색과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문)

마을 내에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4, 문화재자료 12건을 비롯하여 약 40여 건의 전통가옥과 전통적인 마을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음. 마을 내 가옥 대부분은 안동지역 상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뜰 집에 사랑채가 돌출된 날개 집 형태를 취하고 있고, 지형의 영향으로 가옥의 배치가 전체적으로 서향인 점이 특징임. 또한, 영덕지방 자형 가옥에서 많이 나타나는 통래퇴칸을 괴시마을 내 자형 가옥에서도 그 존재와 흔적을 살필 수 있음.”

 

위의 소개말과 같이 괴시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함창김씨이다. 본관지가 상주 함창(咸昌)으로 이수(里數)로 따지면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언제 어떤 연유로 와서 자리 잡은 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 해답을 삼국사기함창김씨 문중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 제14대 유례왕 9, 10년 조의 기사다.

 

“9(292), 여름 6월에 왜적이 사도성(沙道城)을 공함(攻陷, 공격하여 함락함 )하니, 일길찬(一吉飡)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이를 구하고 지키게 하였다. 가을 7, 가물고 메뚜기가 극성이었다.

10(293), 2,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여,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구를 옮기게 했다.”

 

이 기사(유레왕 10년 조)를 근거로 함창김씨는 신라가 사도성에 이주시킨 사벌주 호민 80여 가구는 그들의 선조이며 이주지 사도성을 괴시마을로 본다.

더 나아가 그들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김수로왕과 함께 태어난 6형제 중 둘째 고로(古露)42년에 건국하여 254년 신라에 병합된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의 사람들이며 실제로 상주 함창에는 고녕가야국의 태조 고로왕과 왕비의 능이 있다. 신라군의 공격으로 고녕가야국이 멸망하자 왕조를 다시 세우려고 주민들이 힘을 모으자 후환이 두려운 유례왕(儒禮王)이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목은의 외조부 간재(簡齋) 김택(金澤)은 그때 이주해 온 호민의 후예(後裔)라고 한다.

사도성이 오늘의 괴시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마을 이름 호지촌(濠池村)의 호지(濠池)는 성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늪 즉 해자(垓字)를 말하는바 호지촌은 곧 사도성의 해자가 있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 때에는 사도성, 그 후 호지촌이었다가 현재 불리는 괴시(槐市)1796(정조 20) 영해 지군사(知郡事) 황은(黃檃)이 쓴 가정목은양선생 유허비의 비문에 선생(목은을 말함)은 문장으로 원()나라에 이름을 떨쳤으며 본국으로 돌아오자 구양박사(歐陽博士)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 마을을 괴시(槐市)라고 고쳐 불렀다. 마을은 시야가 넓고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 구양박사의 마을과 비슷해서 이 이름을 취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문이 목은 사후 340년이 지난 후에 쓰였고, 또한, 목은의 어느 서책에서 인용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목은 이색선생기념관의 목은 선생과 괴시리에서는 구양현(歐陽玄) 박사의 마을에서 따왔다 하여 박사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마을 앞 회화나무(일명 홰나무)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나 높은 벼슬아치를 상징한다. 이런 이유로 궁궐이나 서원, 반촌(班村) 등에 많이 심는 데 괴시마을도 마찬가지였다.

한자로는 괴목(槐木) 이라고 한다. 대현(大賢) 간재 김택이 살던 곳이고, 가정 이곡의 처향이자, 목은 이색의 출생지인 이곳에 품격 높은 이 나무를 심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구양, 또는 구양현 박사 마을과 무관하게 괴목이 있는 마을 즉 괴실(槐室), 또는 괴실리(槐室里)가 괴시(槐市)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목은의 작명(作名)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온 주민에게는 이 엉뚱한 반론이 생뚱맞을 것이다. 필자의 시론(試論)인 만큼 더 깊은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이번 괴시마을 살펴보면서 놀라운 사실은 함창김씨 문중의 자료 사도성 곧 괴시마을이 맞다면 한때 북한 공훈예술가였다가 숙청되었던 최승희(崔承喜)의 원작으로 그가 직접 안무, 주연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의 무대가 괴시마을이다.

 

56장으로 된 극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한 신라 사람들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화 한 민족 무용극으로 동해안의 사도성을 배경으로 한 주인공 성주의 딸 금희와 어부 출신의 무사 순지와의 사랑과 애국충절을 그려냈으며 최승희가 43세 때인 1954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초연한 예술성 높은 작품이다.

1956년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98년 호암아트홀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었다. 극의 줄거리는 233년 신라 제11대 조분왕, (助賁王) 47월의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찬(伊湌) 우로(于老)가 사도(沙道)에서 왜적(倭敵)과 싸울 때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배를 태우니 적병들이 물에 뛰어들어 죄다 죽었다.”라는 단 한 줄의 기사다.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는 이 기사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각색한 작품이다. 삼국사기의 방대한 기록 중에서 단 한 줄의 기사로 이처럼 훌륭한 명작을 탄생시킨 최승희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사도성이 어딘가에 데 헤서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미상(未詳)이거나 영덕군 해안지역쯤으로 비정(比定)할 뿐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괴시마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몇 가지 사례를 찾았다.

 

첫째 신라 제14대 유례왕 10년의 기사다. “293년 봄 2,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여,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구를 옮기게 했다.”는 대목이다.

이를 두고 함창김씨 문중 등 사료를 보면 유례왕이 강제이주시킨 호민(부호, 유력자)은 고녕가야국 사람들이고, 이주한 곳 사도성(沙道城)은 현재 괴시마을로 추정되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외할아버지 간재(簡齋) 김택(金澤)의 본관지 역시 사벌주의 함창(咸昌)인 점이고

 

, 괴시마을이 동해를 접하고 있어 왜구의 침범이 잦았을 가능성이 큰 지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 괴시마을의 이름 호지촌(池村)의 호지(濠池)는 성()을 보호하기 위한 늪 즉 해자(垓字)를 말하는바 호지촌은 곧 사도성의 해자가 있는 마을로 보이고

 

넷째 극의 주제인 조분왕 4년 이찬 우로(于老)가 왜를 물리친 곳 사도(沙道)”와 유례왕이 호민을 강제이주시킨 사도성(沙道城)”은 같은 지명 같으며

 

다섯째, 괴시(槐市) 인근의 성내리(城內里) 등 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마을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어 사도성일 개연성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괴시마을은 사도성 이야기탄생 발상지가 된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목은 문화제의 다양한 장르와 더불어 전통민속 마을의 많은 고택, 고래불 해수욕장과 아름다운 송림, 고은 모래밭과 넓은 백사장 등 자연풍광을 아울러 실경(實景) 뮤지컬, 국악과 무용, 나라를 지키려는 신라인의 투쟁 정신 등을 융합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다. 학계 등 전문가의 심도 있는 연구와 군() 당국과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