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우암(遇庵) 이열도(李閱道) 선생과 선몽대·숲

이정웅 2024. 9. 17. 14:27

 

 

퇴계의 친필 선몽대 당호

 

선몽대에서 바라본 내성천

 

후손들이 심고 가꾸는 숲

우암(遇庵) 이열도(李閱道) 선생과 선몽대·

 

예천으로 향했다. 첫 방문지는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仙夢臺, 명승) 일원이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초입 내성천 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다. 호안림, 방풍림, 또는 수구막이용의 비보림(裨補林)이라고도 한다. 숲을 지나 막다른 지점, 강가에 있는 선몽대는 기대와 달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또한, ()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수량(水量)이 줄어들어 그런지 수심도 얕고, 드넓었다는 백사장도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눈으로 보는 모습일 뿐, 6세기 전에는 퇴계의 꿈에 보일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경관은 겉만 화려하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만큼 자질이 부족한 내 기준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닐 것이다. 이 선경을 두고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등이 즐긴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다산의 7대조 정사우(丁士優)가 시문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예천군수였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을 따라 근기인(近畿人)이면서 남인을 지지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도 다녀갔다고 하니 더욱 뜻깊은 곳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의 흔적을 경상도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주로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하고 오래 동안 전남 강진 초당(草堂)에서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강진으로 이배(移配) 되기 전 포항 장기에 머물 때 지역민들에게 그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미담은 들었지만, 다산의 아버지가 예천의 수령을 역임했다는 사실과 다산이 아버지를 따라 선몽대를 찾았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선몽대 일원은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기러기가 내성천의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 한가로이 쉬는 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대()를 물려받은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는 본관이 진성(眞城)으로 이곳 백송리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린도 찰방(察訪)을 지낸 이굉(李宏), 어머니는 안동인 김수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신중하고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미묘한 말과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숙조부(叔祖父) 퇴계가 매우 사랑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1576(선조 9)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감찰, 예조정랑 등을 거쳤다.

1585(선조 18) 외직인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이어 평안 도사로 승진하였다. 1587(선조 20)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 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상도 경산현(慶山縣)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여러 대신이 적임자로 우암을 천거했다. 그는 부임 후 사비(私費)로 우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세금을 골고루 부과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등 불과 1년여 만에 고을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감사(監司, 관찰사)로부터 보자는 연락이 왔다. 상관의 부름이라 급히 달려갔으나 기껏 한다는 부탁이 책의 표지 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특별히 부탁했을 것이나 우암의 생각은 달랐다. 사적(私的)인 일로 바쁜 공직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리 직위가 높아도 부당하다며 관복을 벗어 던지고 물러 나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 이굉(李宏, 1515~1573)이 지은 (당초 우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2021, 문화재청 조사에서 이굉으로 판명됨) 선몽대에서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다가 향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당호(堂號) 선몽대(仙夢臺)는 퇴계가 써준 것으로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라며 우암산(遇巖山)의 절경은 내가 바쁜 일이 많아서 구경하지 못했다. 지금껏 꿈속에서나 상상을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절구(絶句)로 내 뜻을 부치고 또 이로써 그 대()를 명명(命名)한다라며 시를 보냈다.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松老高臺揷翠虛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白沙靑壁畫難如

내가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 吾今夜夜憑仙夢

예전에 가서 기리지 못함을 한탄하지 않노라. 莫恨前時趁賞疎

 

선몽대 일원은 퇴계의 꿈속에서 보이던 이상향이다. 현재도 예천 팔경의 한 곳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초입의 울창한 숲은 대()를 더욱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수령도 100~200여 년 정도(문화재청)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나무는 후손들이 꾸준히 심고 가꾼 것이 된다. 진성이문의 숭조(崇祖)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