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정구 선생과 무흘정사 개비자나무
몇 년 전, 무흘구곡을 답사하면서 퇴락하여 곧 쓰러질 것 같았던 무흘정사를 보고 가슴 아파했던 적이 있다. 남인 예학의 대가, 실학의 원조(遠祖), 영남학을 근기 지역으로 확산시킨 한강(寒岡)이 정인홍과 절교 등 세속과의 인연을 끊으려고 깊은 골짜기를 찾아 여생을 휴식과 저술, 글 읽기에 몰두하고, 소장한 서책을 보관하려고 지은 또 다른 한강의 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김천시가 “무흘강도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하고 복원하여 큰 길가에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무흘강도지(武屹講道地)는 무흘구곡 중 제7곡 만월담(滿月潭)과 제8곡 와룡암( 臥龍巖) 사이에 있는 무흘정사(武屹精舍)의 옛터이다. 한강(寒岡) 정구, (鄭逑1543~1620)가 1604년(선조 37)에 처음 터를 잡았고, 인근 청암사에 기거하면서 직접 공사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한강 선생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고, 주자학에 심취하여 무흘구곡을 경영하면서 낙재(樂齋) 서사원 (徐思遠), 매와(梅窩) 최린(崔轔)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처럼 무흘강도지는 무흘구곡 가운데서도 한강이 직접 거주하며 강학한 핵심적 공간이었으며, 이는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 『뇌헌집(磊軒集)』 등 여러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가 왕래하며 공부한 중요한 역사 문화의 터전이었다. 이와 더불어 한강 정구 가 차지하는 역사적인 비중과 무흘구곡의 수려한 주변 경관 등을 고려하여 기념물(記念物)로 지정한다.” 고했다.
그러나 문화재 명칭을 “무흘정사”라 하지 아니하고 “한강무흘강도지 (寒岡 武屹講道址)”라 하여 품격이 높아 보이기는 하나 무흘정사를 찾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지정 당시 정사(精舍)가 하도 낡아서 문화재로 지정하기가 어렵게 되자 터만이라도 보전해야겠다고 하여 불가피하게 선택한 이름이라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무흘정사로 알고 찾는다. 따라서 “한강무흘강도지”라고 하기보다 무흘정사로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장 바꿀 수 없다면 ()안에 “무흘정사”를 써넣었으면 한다.
무흘정사는 배산임수로 앞은 냇물이 흐르고 삼면은 울창한 숲이 에워싸고 있어 풍광이 좋고 조용하여 수양하고 저술과 독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나 수해(水害)와 화재로 몇 번에 걸쳐 옮기고 새로 짓는 일을 되풀이했다. 한강은 이곳에 짐을 풀고 한 편의 시 “무흘야영(武屹夜詠)”으로 소회를 밝혔다.
산봉우리에 지는 달 시냇물에 어리는데. 峯頭殘月點寒溪
나홀로 앉았으니 밤기운이 싸늘하다. 獨座無人夜氣凄
여보게 벗님네들 찾아올 생각 마소 爲謝親朋休理屐
짙은 구름, 쌓인 눈에 오솔길이 묻혔다네. 亂雲層雪逕全迷
입산을 의도한 바와 같이 휴양과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집필 활동에도 열성적이어서 저술가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1604년(62세)에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경현속록(景賢續錄), 와룡암지(臥龍巖志), 곡산동암지(穀山洞庵志) 1606년(64세) 치란제요(治亂提要) 1607년(65세) 역전(易傳), 태극도설(太極圖說), 계몽도서, 서원세고(西原世稿), 고금인물지(古今人物志), 유선속록(儒仙續錄), 복주지(福州志) 등을 펴냈다.
4년여 동안 무려 14권을 저술하였으니 1년에 3.5권꼴이다. 대단한 열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24일 방조(傍祖)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대감이 만년을 보냈던 포천 계곡의 만귀정을 홍종흠(전, 매일신문 논설실장), 한영기 시인, 김도상 박사와 더불어 찾았다가 무흘정사가 복원되었다고 하였더니 가보자고 해 차를 돌렸다.
새로 지은 산뜻한 모습에 모두 기뻐했다. 필자가 더욱 기뻤던 것은 후손 정재담(鄭在聃)의 중건기와 더불어 응와의 친필 현도재(見道齋) 현판이 걸려 있어 학연, 지연도 없으면서 단지 대구(大邱) 유학을 중흥시킨 분이라는 이유로 북구 사수동에 한강공원을 조성하고, 사양정사 복원을 주도했던 일이 방조 응와의 한강을 존숭하는 마음과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정사 주변은 온통 숲이라 따로 조경수목을 심을 필요가 없을 곳이나, 북쪽에 대숲이 있었다.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선비들의 강학 공간에 주로 심어온 수종이기에 당연히 심어질 나무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앞마당과 남쪽에 심어진 각기 한 그루의 개비자나무(Cephalotaxus koreana Nakai)였다. 늘 푸른 떨기나무로 한국특산 종이다. 흔하지 않은 귀한 나무이기에 어느 골짜기에서 누군가 옮겨 심어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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