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도촌 이수형 선생과 이적(異蹟)의 회화나무

이정웅 2024. 12. 13. 06:48

도톤 이수형 선생이 심은 회화나무

도촌이 돌아가실 때 죽었던 회화나무가 그를 기리는 도촌서원에 금성대군과 이보름을 배향하자 되살아 났다고 한다.

 

도촌이 단종 능이 있는 북쪽으로만 문을 내고 살았다는 공북헌

 

우게이씨 종택

 

도촌 이수형 선생과 이적(異蹟)의 회화나무

 

 

두류도서관에서 괴단광감록(槐壇曠感錄, 1993년 대보사)을 접할 기회 있었다. 수목 분류체계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던 시대에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모두 괴()로 불렀다. 따라서 제목으로 보아 느티나무나 회화나무에 관한 이야기려니 하고 살펴보았더니 예상은 적중했다. 조선 전기 문신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 심은 회화나무가 죽었다가 되살아난 이적(異蹟)을 예찬한 선비들의 시가(詩歌)의 모음집이었다.

도촌은 본관이 우계(羽溪)로 군자감(軍資監) 주부를 지낸 아버지 이경창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 1435(세종 17) 서울에서 태어났다. 개국공신 이억의 후손으로 약관 17세에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어릴 때 수양대군과 가깝게 지낸 사이여서 장래가 자못 화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양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평시서(平市署, 시장에서 사용하는 자, , 저울 따위와 물건 값을 검사하는 일을 맡아보던 기관) 자리를 버리고 처(이조판서를 지낸 문신으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식 달력을 최초로 만든 문절공 김담의 딸)의 고향인 봉화 도촌으로 은거했다.

원호(元昊조려(趙旅)와 함께 치악산에서 절의(節義)를 다짐한 바위 글씨, 치악산제명석(雉嶽山題名石)을 남기고, 오직 북쪽으로만 문을 내고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곳이자 장릉이 있는 영월만 바라보며 평생 절의를 지키며 주변에 한 그루 회화나무를 심고 벗 삼아 살았다. 훗날 창설 권두경이 그 집의 헌호를 공북헌(拱北軒)이라 했다. 평생 바깥나들이를 삼가며 살다가 1528(중종 33) 94세로 돌아가시니 이때 도촌이 심은 회화나무도 따라 죽었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과 봉화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고 1858(철종 9) 승정원 좌승지, 고종 때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1791(정조 15) 인근 순흥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가 사사된 금성대군과 함께 모의했다가 처형된 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배향하였더니 놀랍게도 죽었던 회화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이 이적은 금성단의 은행나무가 금성대군이 사사되고 순흥이 폐부(廢府)가 될

 

때 죽었다가 대군이 복권되고 순흥이 다시 부로 환원되자 되살아난 것과 같았다.

 

이 신이(神異)한 일로 도촌의 행적이 새롭게 조명되고 회화나무 또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자 110여 명의 선비들이 도촌의 업적과 나무의 신비함을 예찬했다. 공조판서 응와 이원조(李源祚)도 그중 한 사람이다.

 

흥주 땅을 지나다 보니 나무들 싱싱한데 / 興州往躅樹亭亭

압각수는 이미 기이함을 보였고, 회화() 또한 신비로운데 /鴨脚已奇槐亦靈

서령(署令) 댁 고죽(孤竹)엔 맑은 바람이 일어나고 / 孤竹淸風署令宅

달 밝은 밤 꽃잎 지는 자규루(子規樓)의 뜨락일레라. / 落花明月子規庭

동류수(東流水)는 지금까지 흐느끼며 흘러가고 / 至今嗚咽東流水

밤마다 쓸쓸하게 북쪽 별만 바라보네 / 每夜蕭森北拱星

사람들은 선생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아서 / 人道先生魂不死

백 년 후에 다시 몇 가지 보게 했다. 말하더라. / 百年重見樹枝靑

 

응와는 성주 사람이다. 거리상 나무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을 것 같은데 시를 남긴 것을 보면 1840(헌종 6) 49세 때 강릉 부사가 되었으니 그때 이곳을 오갈 때 공북헌에 들렀던 것 같아 보인다. 도계서원은 국도변에 설치된 안내판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무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이장(里長) 말에 의하면 한국동란 때도 고사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수령이 70여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촌이 21세 때에 심었다는 기록에 근거하면 생물학적인 수령은 570여 년이나 된다. 그동안 수많은 태풍과 가뭄 등 자연재해와 병해충 등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고귀한 생명체다.

그러나 나무가 단 1년이라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것 같았으나 뿌리 어느 한줄기가 살아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라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

도촌이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궁벽한 시골로 내려와 어려운 삶을 스스로 택하고 절의를 지킨 사실은 여느 평범한 사람과 다른 숭고한 일이기에 한때 고사(枯死)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여 왕성하게 자라는 회화나무에 빗대 부풀려 미화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도촌의 삶이 비록 생육신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행의(行誼)는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지조를 목숨처럼 여겼던 도촌의 선비정신이 깃든 회화나무는 지역의 큰 자랑거리다. 보호수나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