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일연스님의 득도 처 비슬산

이정웅 2006. 7. 29. 19:19

 

 

맨위 비슬산 전경, 중간 삼국유사 피은편에 도성이 머물렀다는 곳 (도성암), 맨 아래 현재 경북대학교 교정에 있는 인흥사지 석탑 

 

최남선(1890~1957)선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놓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택하겠다.”라고 했을 만큼 사료적 가치는 물론 국문학, 민속학, 지리학 등 한국학 연구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책이 삼국유사이다. 특히 올해는 국존 일연(1206~1289)스님이 탄생한 8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스님이 만년에 주석하면서 명저(名著) <삼국유사>를 탄생시킨 군위군 소재 인각사(麟角寺 주지 상인스님)에서는 탄신을 기념하는 ‘법회’와 ‘음악회’를 시작으로, ‘국제학술회의’ ‘문학작품공모전’ ‘일연문화상 시상’ ‘보각국사 비 재 조성’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8세기 전의 스님을 21세기 벽두 다시 이 땅에 걸어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이러한 스님의 훌륭한 모습의 재 조명작업이 활기차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님이 득도(得道)했고, 승려 생활 71년 중 혈기 왕성한 청년기부터 불혹의 나이를 넘긴 장년기와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든 고희(古稀)에 이르기까지 무려 30여 년을 보낸 비슬산을 관할하는 시(市), 군(郡)이나 한 때 주석했던 사찰에서는 이런 행사가 있는지 조차 모를 만큼 외면했던 점은 매우 아쉽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님은 고려 희종 2년(1206) 대구 인근 경산 압량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남도 광주(光州)의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불법을 배우고, 열네 살 되던 해에는 강원도 양양 땅의 진전사(陣田寺)에서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구산선문(九山禪門) 한 파인 가지산문계(迦智山門系)의 스님의 되었다. 스님이 태어난 경산 가까운 곳에는 동화사와 운문사 같은 큰 절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멀고 먼 전라도와 강원도까지 가서 승려의 길로 들어섰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하니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구산선문 중에서 당시 가장 정통이라 자처했던 가지산문의 맥을 잇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부차원에서도 하기 어려운 불후의 명작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을 보면 어쩌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지(閔漬, 1248~1326)스님이 주도해서 만든 “고려국 화산(華山)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하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에는 스님이 비슬산에 들어와 수도하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포산(包山, 비슬산의 옛 이름)의 보당암에 주석하며 마음 속 깊이 참선하였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하자 스님은 피신을 하고자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를 염송하여 감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벽 사이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無主)의 북쪽’이라 일러 주었다. 이듬해 여름 다시 이 산의 묘문암에 거쳐하였는데, 암자의 북쪽에 절이 있어 이름이 무주였다. 이에 스님은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 암자에 거쳐하였다. 이때 스님은 ‘생계는 줄지 않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生界不滅, 佛界佛增)’는 말을 가지고 참선하였다. 하루는 활연한 깨우침이 있어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오늘날에야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으며,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 비문(碑文)을 통해 스님의 득도 처가 비슬산이며 당시 비슬산에는 보당암, 묘문암, 무주암이라는 세 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스님은 무신정권의 실력자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부근의 정림사에서 팔만대장경 제작에 관여하고 몇 군데 다른 절을 더 거쳐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와 화원 소재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었다. 스님이 이곳에 오자 원근에서 법문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화원 나루터의 이름이 승려의 세계를 뜻하는 사문진(沙門津)으로 바뀐 것이 이때가 아니었던가한다. 스님은 절을 크게 중창하고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건의하여 인흥사(仁興寺)란 현판을 조정으로부터 받는다. 오늘날 마을 이름 인흥 역시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스님께서는 주지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핵심 내용이 되는 ‘역대연표’를 발간한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유사의 초간본 역시 인흥사에서 발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청도 각북의 용천사로 자리를 옮겨 절 이름을 불일사(佛日寺)로 바꾸기도 했다. 스님의 탄생 8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로 나라가 떠들썩했으나, 비슬산에 숨어사는 관기와 도성 즉 ‘포산의 두 성사’에 글을 쓰고, 승려생활의 거의 절반을 보내며 수도했던 암자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삼국유사의 산실 인흥사(仁興寺)는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져 논밭으로 변했고 그 곳에 있었던 오층탑마저 제자리를 떠나 경북대학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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