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전설의 보고 울릉도

이정웅 2006. 12. 16. 20:07

 

 성인봉

 성하신당의 동남동녀상

 바닷가에 만발한 참나리 


동해의 외로운 섬 울릉도는 지증왕(智證王,) 13년(512)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강릉))의 장군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신라에 복속된 이후 조선조  고종 20년 (1883) 본토에서 모집한 16가구 54명에게 식량과 종자를 주어 울릉도에 정착시키기 전까지 1,400여 년 동안은 사실 영토만 대한민국 소속이지 조정이나, 일반 백성들의 관심밖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육지에서 건너갔거나, 미리부터 살고 있던 주민들이 지형적인 악조건을 극복하고 논밭을 일궈 농사를 짓거나, 어업을 영위하거나, 산삼 등 약초(藥草)로 소득을 올리거나, 풍부한 산림을 이용해  어선을 건조(建造)하는 등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던 그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육지로 강제이주를 시키는 등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써 오히려 섬을 황폐화 시켰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부의 보살핌이 없는 데 비해,  시도 때도 없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倭寇), 농사를 짓기에 충분하지 못한 척박한 땅, 긴 겨울과 많은 적설(積雪) 등으로 외로움이 커서 그런지 어느 지역보다 전설이 많다.

 

성인봉(聖人峰)


맑은 날보다 비가 오는 날이 많은 울릉도에 어느 해 석 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자 섬사람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한숨만 쉬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무슨 괴변으로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는지 점(占)을 치기로 했다.

‘성인봉 꼭대기를 파 보아라.’

점쟁이가 말했다.

곡괭이, 삽, 괭이를 들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꼭대기를 파헤쳐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구렁이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슨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꼭대기에 이르렀으나, 이 번에는

‘나는 팔을 다쳐서’

‘나는 설사를 해서 기운이 없네.’ 라고 핑계를 대면서 한발 물러서거나

‘나이 많은 어른이 먼저 파야지’

‘아니 도사(道師)가 먼저 파야지’ 실랑이를 벌이다가 도사가 먼저 삽을 들고 한 길쯤 파내려가자 김이 물씬 솟아올랐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며

‘이상하다’

‘이상해’

하면서 호기심에서 자꾸 깊게만 팠다.

‘에그 머니’

매장(埋葬)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 시체였다.

‘이것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았구나.’

파낸 시체를 개울로 굴러 버렸다.

순간 비가 내렸을 뿐 아니라, 소나기로 변했다.

그 후 섬사람들은 굿은 일이 있을 때마다  용하다는 그 점쟁이를 찾았을 뿐 아니라, 날이 가물면 성인봉 꼭대기를 파헤치게 되고 그럴 때 마다 관이나, 시신(屍身)이 나왔다고 한다.

 성인봉은 명산으로  꼭대기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繁昌) 한다는 풍수지리설을 믿고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장군(將軍) 터


울릉도의 상징이자 주민들의 마음의 고향인 성인봉에는 큰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발자국이 왼발이기 때문에 오른 쪽 발자국은, 육지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 큰 보폭(步幅)으로 보아 장군의 체구 역시 보통 사람과 달리 어마 어마하게 클 것이 이라고 상상된다.

하루는 육지에서 사자(使者)가 왔다. 성인봉은 명산인 만큼 그 정기를 받아 용맹스러운 장수가 태어나, 육지를 위협하게 되면  곤경(困境)에 처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미리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장수가 태어날 만한 곳의  혈맥(血脈)을 자르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밝은 그들 일행이 성인봉을 올라 지맥의 흐름을 살피던 중 누군가 한 사람이 “여기다 ” 하자 일행은 그 자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 길 정도 깊게 파내려 갔을 때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장군이 태어날 수 있는 혈맥이 끊어진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울릉도에서는 큰 장수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그 사자들이 육지(陸地) 사람이 아니고 일본인이었다고도 한다.


산신령(山神靈)이야기


울릉도가 아직 개척(開拓)되기 전 본천부(本天府) 마을에는 가난하게 사는 농부가 있었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이집의 노모(老母)께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린 손녀를 데리고 이제 막 땅속을 뚫고나오는 봄나물을 뜯기 위해 산을 올랐다. 갈 때에는 여럿이 함께 가지만 막상 산에 다다르면 각자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린 손녀가 혹시나 길을 잃지 않을까 하여 함께 작업을 했으나, 나물 뜯는 데 정신이 팔려 그만 손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이미 날은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해도 손녀는 나타날 줄 몰랐다 손녀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찾았으나, 허사였다. 어둠이 짙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자 산을 내려 온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청장년들이 횃불을 들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맸으나, 끝내 손녀는 나타나지 않자 다음 날로 미루고 산을 내려왔다. 이튿날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찾기에 나서 지난밤과 같이 산을 뒤지며 이 골짝 저 골짝을 누비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한 골짜기에서 “찾았다” 는 마을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 모두들 그 곳으로 모였다. 그러나 그 곳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絶壁)의 중간 지점이었다. 마을의 청장년들이 밧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가 위에서 몇 사람이 밧줄을 끌어 당겨 마침내 그 손녀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으나, 그 소녀는 구출되자마자 실신(失神)하고 말았다. 업고 마을로 내려와 응급조치를 하자 곧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소녀에게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위험한 곳에 갔느냐고 물었더니


“나물을 뜯다가 잠이 와 잠시 누워 있었더니 수염이 허연 노인이 나타나 어린 소녀가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되니 나를 따라 오라하여 할아버지를 따라 갔더니 커다란 기와집이 있고 방안에는 푹신한 이불까지 있고 할아버지가 자장가를 불러주어 자고 있는 데 부른 소리에 깨어났다”


고 대답했다.

그 후 사람들은 꿈속의 그 노인을 성인(聖人)이라고 여겼으며 그가 사는 산이라 하여 성인봉(聖人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인봉의 산삼(山蔘)


아주 오랜 옛날, 신라(新羅)의 한 두메산골에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면서도 아들을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키는 가난한 모자(母子)가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처럼 아들은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효성(孝誠) 또한 극진하여 틈틈이 나무를 해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어머니가 자리에 눕게 되고 효성이 극진한 아들이 열심히 간호하고 보다 못한 이웃들도 백방(百方)으로 도와주었으나, 좀처럼 낫지 않았다. 하루는 간병으로 지친나머지 어머니 곁에서 그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수염이 허연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애야 너의 지극한 효성을 내가  갸륵하게 여겨 비방(秘方) 한 가지를 알려 줄 터이니 반드시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구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모월 모일 동해 바닷가로 나가면 배가 있고 그 배를 타고 가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면 산삼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어머니께 달여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고서는 홀연(忽然)히 사라졌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비록 꿈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서 어미니 병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어머니께 하고 떠날 차비를 했다. 어머니께서는 늙은 내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너를 그 험한 낫선 곳에 보낼 수 없다며 한사코 만류했다. 그러나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하든 어머니를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꿈속에 노인이 일러 준 그 바닷가로 나갔다. 신기하게도 한 척의 배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탈수 있었으며 며칠 동안의 항해(航海) 끝에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닿았다. 잠시 몸을 추 스린 다음 산으로 향했으나, 높고, 골짜기가 깊을 뿐 아니라,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약(靈藥)이라는 산삼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육지 출신인 그가 알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마침내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까지 이르렀으나, 몇 날 며칠을 풀과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운만큼 몹시 지친나머지 앉아 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러자 지난번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

“애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의 옆에 빨간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이 바로 산삼이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에 있는 커다란 산삼을 캐 황급히 산을 내려와 마을에 닿았으나 아직도 며칠을 더 기다려야 육지로 가는 배가 뜬다 하여  그 곳에 묵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마음은 바다를 걸어서라도 빨리 육지에 있는 어머니께 달여 드리고 싶었다. 드디어 기다리든 배가 뜨게 되고 올 때와 같이 며칠 만에 육지에 닿았다. 그는 쉴 새도 없이 집으로 향했고 미침내 두 모자는  얼싸안고 울었다. 정성스럽게 고은 산삼을 드신 어머니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이야기가 서라벌(徐羅伐)까지 퍼지게 되자 임금님도 알게 되어 후한 상까지 내렸다고 한다.


동백꽃 사연


어느 마을에 금슬(琴瑟)이 좋은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육지에 일 보러간 남편이 약속한 날짜가 훨씬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부인은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이 정성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그만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남편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고 싶어“내가 죽거든 남편이 타고 오는 배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라는 유언(遺言)을 남기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극히 지아비를 사랑했던 그 녀를 양지바른 언덕 포구(浦口)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어 주었다. 장례를 치르고 막 돌아오니 그 집 뜰의 후박나무 숲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많은 흑비둘기가


“아이 답답.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

온다.

남편이 온다.

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

넉넉잡아서  ”


하고 울어대자 마을 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남편이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은 남편은 단걸음에 아내의 무덤을 찾아 서럽게 울었다.


“왜 죽었나.

일년도 못 참더냐.

열흘만 참았어도

백년해로(百年偕老) 하는 것을

원수로다, 원수로다.

저 한 바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 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


하고 아내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매일 되풀이 하며 아내의 무덤을 찾은 어느 날 발길을 돌리려는 데  평소 보지 못했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 있고 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추운 겨울 하얀 눈 속에서도 남편을 사랑하는 식지 않는 정열인양 붉은 꽃을 피우니 섬사람들이 동백(冬栢)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너도밤나무 이야기


하루는 산신령이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이 산에 밤나무 백 그루만 심어라” 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山神靈)이 시키는 대로 밤나무 백 그루를 하루 만에 다 심었다. 심은 나무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또 찾아왔다. 이야기한데로 밤나무 백 그루를 다 심었느냐? 예 백 그루 다 심었습니다. 틀림없겠다. 예, 틀림없습니다. 그럼 같이 세어보자

하나, 둘, 셋......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산신령은 화가 났다.

이 놈들이 나를 속이다니.

반드시 백 그루를 심었습니다. 신기한 노릇 입니다.

정녕 백 그루 심었겠다.

예.

그럼 다시 세어보자 이번에 세어보고 모자라면 벌을 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예,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아무리 헤아려도 한 그루가 모자랐던 터이라 벌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흔 여섯, 아흔 일곱,......  아흔아홉,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모자라는 한 그루가 땅에서 솟아 날 수도 하늘에서 내려 올 수도 없었다. 밤나무는 아흔아홉 그루가  분명했다.

그런데 뜻밖에 옆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고 외쳤다.

산신령이 “너도밤나무?” 가 맞느냐고 하니 그 나무가 “예”하고 대답하여 그 후 이 나무의 이름은 “너도밤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以上)은 울릉군지(鬱陵郡誌) 등에서 발췌한 울릉도의 전설로 산이나, 나무에 얽힌 것만 가려  뽑은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울릉도는 우산국이 패망한 이후 한반도 어느 왕조로부터도 따뜻한 보살핌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따라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원망과 항거로 가득 찼을 만 한데도 그렇지 않는 것을 보면 울릉주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순박한 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성하신당(聖霞神堂)에 관한 전설만 해도 그렇다. 섬에 남겨진 어린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이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 울릉도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굶어 죽었다고 하여 비록 전설이라고 하지만 너무 비극적이야기다. 매년  음력 2월 28일 제사(祭祀)를 지내 전설 속의 두 주인공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의 어느 전설에도 그들을 버리고 떠난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를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점이 참으로 이채롭다. 1417년 (태종17)울릉도를 다녀 간 김인우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당시 울릉도에는 15가구 86명이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