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 정원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바깥채
민들레(토종)
몇 주 전 모 TV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봄이라 시민들이 나들이할만한 곳을 찾아가며 주변에 자라고 있는 야생화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현직에 있을 때부터 자주 TV에 출연했다.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거나 직위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무가꾸기와 꽃 심기, 향토의 역사 문화유적지를 공부했던 것이 최근 시대상황에 맞아 시청자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든 것이 퇴직 후에도 이어졌으니 아내로서는 좋아서 그런지 알만한 곳에 미리 전화를 걸어 보라하고 스스로도 방영 시각에 TV앞에 앉아 지켜보더니 이제는 출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화면을 통해 보는 얼굴에 늙은 티가 역력해 추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체력이 떨어지고, 눈이 침침해져 늙음을 못 느끼는 바는 아니지만 아내로부터 직접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절실히 다가와 자제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후 또 연락이 왔으나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나섰다.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였던 팔조령, 선비 이육(李育)이 낙향(落鄕)해서 조성한 유호연지(일명 유등지)와 청도읍장,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1912~1970)와 그의 누이이자 청마 유치환과의 아름다운 로맨스로 잘 알려진 이영도(李永道 1916~1976)님의 생가를 둘러보는 프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동행한 리포터 문양이 ‘방송국 리포터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가 출연하는 사람들 중에 선생님의 표정이 가장 편안해서 좋다.’고 한다하여 아내의 지적과 상반되는 평가에 다소 어리둥절했으나 기분은 나쁘진 않았다. 특히 이호우님의 생가는 나도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바로 이웃 고을에 있는 훌륭한 예술가의 삶의 흔적이 베여있는 생가를 찾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촬영을 지휘하는 피디가 미리 알아보았다고 했으나 자세한 이정표가 없어 몇 군데 전화를 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생가를 찾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문이 잠겨있어 관리하는 분을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옆집에 물어보았으나 모른다고 했다. 더 난감한 것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그 흔해빠진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다하니 더 이상 물어 볼 곳도 없었다. 자꾸 시간만지체할 수 없어 옆집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순간 지체한 얼마간의 짜증을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듯 마당 한 쪽에는 떨기나무인 풀또기가 진분홍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며 우리를 반기고 서향(瑞香)이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그 외에도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앵두, 동백꽃이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초입에는 1997년 한국문인협회가 작고 문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이호우·이영도님을 기리는 표석 두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붓꽃, 원추리, 산철쭉, 참나리 등 우리 자생식물들이 자라 주인의 고졸(古拙)한 취미를 엿볼 수 있었다. 크지 않는 바깥채와 안채 두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유했다는 기록과 달리 소박한 집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문양(文孃)은 계절에 맞는 작품 “살구꽃 핀 마을”을 암송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려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그러나 문학 소년이었던 나에게 이호우 시인은 “달밤”의 작가로 오히려 더 알려져 있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흐르는 금빛노을에 배를 맡겨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든 그날 밤도/
할버진 율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세소서.
나는 국어 책에 나온 이 시를 외우다시피 했었다. 촬영을 마칠 때 쯤 할머니가 들어오더니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며 버럭 화를 냈다. 다소 결례를 했으나 찾아온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지는 못할망정 화를 내는 데에는 실망스러웠다. 이호우님과 관계를 묻자 시숙이며 가족들이 이사 갈 때 이집을 사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찾아오는 묻는 것이 귀찮다는 투의 그를 보면서 이것이 오늘 날 한국 문학의 현 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선생님이 훌륭한 예술가였다고 해도 그 할머니에게 선생님은 어쩌면 라면 한 박스 들고 오는 사람보다 못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랑스럽기는커녕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집을 둘러보거나 꼬치꼬치 물으니 귀찮기만 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시군에서 그 할머니에게 일정액의 급료를 주든지 아니면 책이나 기념품 등을 팔게 해 다소간의 소득을 보전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뒤 안 빈터에 민들레가 노랗게 피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토종이었다. 깊은 산골짜기까지도 서양민들레가 뒤덮어 귀화식물이 판을 치고 있는 마당에 마을 한 복판 선생님의 생가에서 토종 민들레를 볼 수 있다니 무척 흥분이 되면서 이 민들레가 우리 땅을 지키려고 애쓰듯이 선생님 역시 우리 고유 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를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점과 닮아 경이롭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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