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덕사와 문우관이 있는 집 전경
상덕사 비각
문우관
동아쇼핑 건너편 천주교 관덕정순교기념관을 왼편에 두고 언덕길을 올라가서 남산교회를 지나 오른 쪽 길로 접어들면 전통담장으로 둘러싸인 고가(古家)가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맞은 편 건물에는 상덕사비각(尙德祠碑閣), 왼쪽 건물에는 문우관(文友館)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작은 꽃밭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관리사가 있다.
조금은 퇴락(頹落)해 허름해 보이지만 이 집이야 말로 대구사람들이 폐쇄적이 아니고 개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21세기 대구를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시급히 개선해야할 의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시민정신을 개방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은 이런 악습을 버리지 않은 한 어떤 패러다임으로 도시발전을 꾀해도 성공하기 어렵다고까지 한다. 한술 더 뜨는 사람들은 대구는 본디부터 수구(守舊)골통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까지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고 믿을만한 지도층으로부터도 되풀이되다보니 일부 시민들에게는 사실인양 받아드려져 한 동안 T·K 소외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구 사람들의 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김영삼정부 이후 김대중정부를 거쳐 현 노무현정부에 이르기까지 대구시민들은 이들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은 대구시민들이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고 수구적인 자세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이 강한 대구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세력들이 지어 낸 것일 뿐 전통적으로 대구사람들은 배타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가 17세기에 건립된 상덕사와 문우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조 선조 대에 와서 이조전랑이라는 하급관리의 임명을 두고 기호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西人)과 영남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동인(東人)이 대립하면서 싹트기 시작한 붕당은 동인이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되면서 대구는 다른 경상좌도의 고을과 같이 남인(南人)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대구는 낙재 서사원(徐思遠)과 모당 손처눌(孫處訥) 두 분이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재지 사족들을 이끌어 가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임란 시 지역민을 참여시킨 의병활동이었다. 이들은 퇴계학맥을 이어받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이른 바 남인(南人)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배출한 선비들로 이루어진 대구 사림(士林)은 모두 남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서인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도 있어 대구 사림은 대다수가 남인이었지만 소수의 서인이 공존하는 특이한 분위가 형성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발생한 사건(?)이 상덕사(尙德祠) 건립이었다. 특히 죽은 후에 지어지는 여느 사람의 사당(祠堂)과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건립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적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인(西人)의 거두 이숙의 사당이 대구 한 복판에 건립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론의 장본인이었든 이숙(李䎘, 1626~1688)은 1672년(현종 13)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했다. 때 마침 고을에는 대흉년이 들고 그는 참다운 목민관의 자세로 백성들을 보살펴 주었을 뿐 아니라, 문우관이라는 강학(講學)장소를 지어 지역의 선비들이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도록 학전(學田)까지 마련해 주는 등 선정을 배 풀었다.
이를 감사하게 여긴 유림들이 살아 있는 그를 기리는 생사당을 건립한 것이다. 당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참배하려고 했을 때 극렬히 반대했던 다른 지역 사림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1726년(경종 2)과 1737년(영조 13) 두 차례에 걸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며 역시 선정을 펼쳤던 같은 서인계의 유척기(1691~1767)까지 상덕사에 모셨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는 대구사림(大邱士林)이 배타적이었다면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방적인 대구사람들의 정신은 이 일로인해 발단이 된 것이 아니라 먼 고려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달성하씨(夏氏), 대구빈씨(賓氏)는 중국계로 대구에 귀화하였으며 두릉두씨(杜氏)와 사성(賜姓) 김해김씨는 조선조에 각기 중국과 일본에서 귀화해 지역의 토착민들과 더불어 오늘 날까지도 시민의 일원으로 살아온 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듯이 대구사람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다면 국내의 다른 지역도 아닌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그들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남아서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며 살 아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16세기 경상좌우도를 중심으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이 경쟁관계가 지나쳐 반목할 때에도 대구 사림은 이들 양대 학맥이 공존하는 특이한 학풍을 형성한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구 사림은 앞서 말한 양 학파를 모두 출입한 한강 정구의 개방적이고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하여 그 정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일에서는 대구시민들의 진취성을 읽을 수 있고, 1956년 실시된 제3대 대통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 후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진보성향의 조봉암후보에게 이 후보보다 많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여 대구가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 사는 도시임을 표출했고, 뿐만 아니라,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하선이 된 2.28의거를 통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구시민의 정의감을 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충청도 출신 야당 지도자 조병옥 후보를, 제5, 6대 대에는 전라도 출신 조재천씨를 당선시킨 사례에서는 출신 지역이 어디든 인물 본위로 사람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구사람들은 본디부터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지 배타적이거나 수구 적이 아니라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시민정신은 어제 오늘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 이루어 진 것임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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