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히데요시의 우엉이야기

이정웅 2007. 4. 23. 22:03

[수암칼럼]

 

며칠 전 어느 동창회 동문모임 회식자리에 전직 고위 법관을 지낸 변호사와 현직 고위 법관이 한자리에 앉았다. 좌중에 마주 앉아있던 동석자가 한마디 던졌다. ‘현직 판사가 변호사 하고 같이 밥 먹으면 되느냐.’

얼마 전 판사들에게 변호사와는 같이 밥자리 같은 거 하지 말고 법관 집무실에는 외부인 접근까지 금지한다는 지침이 나온 뒤라 자연스레 던져진 농담이었다. 우스개였음에도 반듯하기로 이름난 현직 고위법관은 성품대로 굳이 해석을 달아주었다. “동창회 회식 같은 모임은 해당 안 됩니다.” 공직자의 청렴 기준이란 게 때때로 보통 시민들이 보기엔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변호사와 판사가 칼국수나 국밥 한 그릇 같이 앉아 먹는 게 대수냐는 평범한 생각 같은 것이다. 같이 밥 먹으면 부패고 따로 먹으면 청렴한 거냐는 생각을 하면 우습다는 게다. 그런데도 가끔씩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시시콜콜 부하 공직자들에게 무엇은 하지 말고 어떤 것은 삼가라고 닦달한다.

업자나 민원 관계자와 골프를 치지 말라는 것도 그런 類(류)의 청렴타령이다. 판사들에겐 밥 한 그릇도 맘 편히 못 먹게 해놓은 분위기 속에 어제 낮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후원자로 소문난 탈세전과 기업인과 부부동반 골프를 또 쳤다는 뉴스를 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우엉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대통령의 골프에 도요토미의 우엉이야기를 끌어다 붙이는 건 지도자의 주말 휴식을 왈가왈부하자는 게 아니다. 우엉을 즐겨 먹었던 도요토미가 나카하마의 城主(성주)로 승진하자 고향인 오와리 나카무라 마을사람들이 축하선물로 무얼 바칠까 의논 끝에 고향 우엉을 가져갔다. 도요토미는 기뻐하며 상관인 오다노부나가에게 고향인 오와리 마을사람들의 소박하고 정성된 마음을 봐서라도 세금을 면제해달라고 건의, 면세 특혜를 받았다. 그 뒤 도요토미가 간빠꾸(關白)로 승진하자 마을사람들은 이번엔 성주가 아닌 간빠꾸 벼슬까지 올랐으니 더 큰 선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값비싼 비단을 들고 갔다. 좋아할 줄 알았던 도요토미가 안색이 변한 채 꾸짖었다.

“사람은 출세하고 권력을 쥐면 옛날 일을 잊는다. 뇌물을 자주 받으면 큰 선물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더 큰 뇌물을 당연한양 바라게 된다. 나는 그런 유혹이 생길 때마다 고향의 우엉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듬고 고생하는 고향사람에게 신세진 일을 떠올렸다. 편안하면 백성의 고통을 잊기 때문이다. 선물로 비단을 사오는걸 보니 너희도 이제 여유가 있다는 얘기니 면세를 취소한다. 돌아가 다시 세금을 내라.”

청렴이라는 것이 돈 안 먹고 국경일에만 골프 안치면 다 지켜진 것이 아님을 깨우치는 일화다. 청렴은 결국 형식적 指針(지침)의 복종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이다. 권력에 취하면서 무디어지고 익숙해지고 잊어버리는 것을 고향 우엉을 생각하듯 스스로 다잡는 솔선과 자기극복이 곧 청렴이다. 도요토미도 끝내는 권력이 더 커지면서 金(금)으로 주변을 치장하며 부패에 무디어지고 익숙해져 옛날을 잊고 몰락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판사 밥자리 금지 같은 자질구레한 지침의 과시가 아니라 무디어지고 익숙해지고 잊어버리는 ‘정신’을 가다듬는 일이다. 벌써 차떼기당의 과거를 망각하고 공천헌금을 받으며 옛날을 잊어버린 야당. 회계부정 시비에 휘말린 사명감에 무디어진 언론노조. 대북 중유지원 처리 미숙으로 수십억 국고를 날리고도 책임지겠단 사람 없는 무책임에 익숙해진 정부. 그런 껍데기 청렴과 익숙해진 부패의 반복을 보며 민중의 가슴에도 청렴과 부패를 가려내는 감각이 무디어져가고 웬만한 부정쯤엔 익숙해지거나 모른 채 잊어버리려 드는 반발심이 들어차게 되면 나라가 무너진다.

滄浪(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고 했다. 나라의 풍조가 청렴하면 官民(관민)이 지침 없이도 옷깃을 여미고 지도자 그룹이 물을 더럽히면 관리와 백성도 갓끈 대신 때 묻은 발을 들이민다.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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