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낙엽거리

이정웅 2008. 10. 2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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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은 요 며칠 새 단풍이 절정에 이를 모양이다. 남에서 북으로 달려가는 봄날의 花信(화신)과 달리 가을 단풍 소식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다. 내주쯤이면 이곳 남녘에도 때때옷 나무들이 부쩍 늘어나겠지.

단풍은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분명한 기후대에서만 나타난다. 열대 지역이나 동남아 등 常夏(상하)의 나라 사람들은 ‘단풍’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 잎에서 초록색이 빠져나가 알록달록하게 바뀌는 것이 마법처럼 신기할 만하다.

단풍은 봄부터 여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던 나뭇잎이 가을이 돼 더 이상 활동을 멈추면서 엽록소가 파괴되고 자가분해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안토시안이 생성되는 종류는 붉은 색이나 갈색 계열 색깔을 띠게 되고, 안토시안이 만들어지지 않는 종은 잎 자체에 들어있던 노란색이 나타난다고 한다.

곱디곱게 물든 나뭇잎들은 그러나 머지않아 그 화려한 잎들을 남김없이 떨어뜨리고 裸木(나목)이 된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없노라고, 말 없는 나무들이 일깨워 준다.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잘 알면서도, 名利(명리)에 집착해 아등바등하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나무들의 처연한 메시지다. 어쩌면 우리네 지독한 건망증 때문에 해마다 나무들은 몸소 그 아픔의 여정을 되풀이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매년 이맘때면 대구시는 도심과 근교의 낙엽이 아름다운 곳을 ‘낙엽 거리’로 지정한다. 올해는 20일부터 한 달간 팔공로`파계로`수성못길 등 20곳, 모두 46.5㎞ 구간이 지정됐다. 이 기간엔 낙엽이 수북수북 쌓이도록 그냥 둔다. 노란 은행잎과 느티나무잎, 빨간 벚나무잎처럼 고운 낙엽들만 있는 게 아니다. 누르죽죽한 플라타너스잎, 바짝 오그라든 이름 모를 이파리까지 온갖 죽은 잎들이 포도 위에 뒹군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되는 김광균의 시 ‘秋日抒情(추일서정)’의 구절들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이다.

전 세계적 경제 위기로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한껏 커지는 요즘이다. 낙엽길이 일상에 지치고 상심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쉼터가 됐으면 싶다. 날만 새면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한 소식뿐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갓진 마음을 되찾으려 애쓸 필요가 있다. 낙엽길을 걸으며 가을날의 전설 같은 구르몽의 시 ‘낙엽’의 한 구절이라도 낭송해 보는 이 가을이 됐으면….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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