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나말여초 국내외 누빈 문신·정치가 최언위

이정웅 2009. 8. 1. 08:09

나말여초 국내외 누빈 문신·정치가 최언위

왕건이 고려 창건하자 투항해
개국 초기 학술분야에 큰 기여

최언위(崔彦�h·868~944)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 18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당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친 신라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857~?)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아마도 신라사회에서 6두품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집안 분위기가 국제(國際)지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사촌형' 최치원도 13살에 당나라로 유학해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글로벌 명문가였던 셈이다.

당나라에 들어간 최언위는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얼마 후 과거에 급제한다. 그때의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발해의 재상 오소도(烏炤度)는 마침 당나라에 왔다가 급제자 명단에서 자기 아들의 이름이 최언위의 이름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서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제가 옛날에 입조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 이름이 이동(李同)의 윗자리에 있었으니 이번에도 저의 아들 광찬을 최언위의 윗자리에 올려주십시오." 노골적으로 순위조작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최언위의 재간과 학식이 월등했기 때문에 오소도의 청을 묵살해버렸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최언위, 오소도, 이동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조선후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중국 과거 시험에 급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신라사람은 김운경 함통중 김이어 김가기 최치원 최광유 김문울 이동경복(李同景福) 최승우 최언위 최광윤 박인범 김악 등 13명이고 발해사람은 고원고 오소도 오광찬 사극찬 등 4명이다. 최언위 최광윤이 부자(父子)이고 오소도 오광찬이 부자(父子)이다. 오소도가 언급한 이동은 이동경복을 가리키는 듯하다.

당나라에서 관리생활을 하던 최언위가 고국 신라로 돌아온 것은 42살 때다. 대략 910년 무렵이다. 이 무렵 한반도는 궁예 견훤 등이 쇠퇴하던 신라를 압박하며 각축전을 벌이던 때였다. 귀국한 최언위는 일단 신라에서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 등의 벼슬을 했다.

그러나 이미 신라에서 마음이 떠나 있던 최언위는 왕건이 고려를 창건(918)하자 가족을 데리고 투항해 요직을 두루 거치며 평장사(平章事·2품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던 고려 개국 초기 왕건을 도와 학술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다. '고려사'는 왕건에게 투항한 최언위의 활약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조는 최언위를 태자 사부로 임명하고 문필에 관한 임무를 맡겨 주었는 바 궁원(宮院)의 편액과 이름들은 모두 다 그가 지은 것이었으며 당시 왕실과 귀족들이 모두 다 그에게로 몰리었다."

궁원의 편액과 이름들을 그가 다 지었다는 점에서 최언위는 '고려의 정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 궁궐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기 때문이다. 최언위 집안에 눈길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국제적 수준의 교육열 때문이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에 공부를 배운다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최언위는 아들들도 유학을 보낸다.

장남 광윤(光胤)은 진(晉)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어떤 사정으로 거란의 포로가 된다. 이유원의 기록에 따르면 최광윤도 진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했다. 다행히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거란 조정은 그를 중용했고 심지어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때 최광윤은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려 한다는 특급기밀을 고려 쪽에 전해주기도 했다. 둘째 행귀(行歸)도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해 그 나라의 고위직에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고려로 돌아와 광종(光宗)의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휘말려 사형을 당하게 된다.

셋째 광원(光遠)도 유학은 안 갔지만 벼슬을 했는데 그 아들이 고려 초 명신(名臣)의 한 명인 최항(崔沆·?~1024)으로, 고려 성종 때 20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고 특히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로 있으면서 뛰어난 인재들을 공정하게 선발해 목종으로부터도 큰 총애를 받았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와 정부(情夫) 김치양이 꾸민 반란음모를 사전에 알아내 현종을 맞아들임으로써 반란을 좌절시킨 사건이다. 현종은 "최항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