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안동 묵계서원과 보백당 김계행, 응계 옥고

이정웅 2009. 8. 5. 18:04

 

 보백당 종택

 보백당당호

보백당 김계행과 청백리  응계 옥고를기리는 묵계서원

 묵계서원 읍청루

 

 '우리집엔 보물은 없다. 있으면 청백(淸白)이 있을 뿐이다. 보백당의  유훈

 보백당이 만년을 보낸 만휴정

  •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안동(安東)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했다. 그 결과 안동이 석 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는 320점, 안동은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 溪書院)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호젓한 옛길이다. 더 먼 옛날에는 내륙 속의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驛)이름이 거무역(居無驛),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이다.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登第)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寓居)해 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淸白]이 있을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유훈(遺訓)을 남긴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훗날 묵계서원이 세워졌다. 이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비경(秘境)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인데 안동에는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된다.

 

참고사항

김계행(金係行)에 대하여

김계행(金係行)
1431(세종 13)∼1521(중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아버지는 비안현감 삼근(三近)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蘴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옥고(玉沽)에 대하여

옥고(玉沽)
1382(우왕 8)∼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售), 호는 응계(凝溪). 사미(斯美)의 아들이다.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399년(정종 1)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뒤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과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등을 거쳐 1408년(태종 8) 경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1420년(세종 2) 집현전의 설치와 함께 재행이 있다 하여 교리에 선보(選補)되었으며, 사간원정언·예조정랑·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할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았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안동의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