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 우산국의 도읍지 현포
현포의 겨울 풍경
현포항의 저녘노을
고인돌이 현포와 내수전에서, 무문토기와 유사한 것이 역시 현포에서 발견되어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기원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에는 본토에서도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가 건국했거나 건국하려할 때이다.
따라서 우산국의 모체도 이 시기에 확립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실을 입증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물론 문헌도 없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 조에 보인다.
현포의 고분
옥저의 기로(耆老)가 말하기를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표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7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이때가 245년(고구려 동천동 19)으로 동쪽 섬이 곧 울릉도라는 것이다. 그 후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정복된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비록 신라에 항복했지만 지리적으로 신라의 왕권이 이곳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산국은 독자적인 나라로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포동에 산재한 40여기의 고분(古墳)중에서 남아있는 10기(경상북도 기념물 제73호)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1159년(고려 의종 13) 명주도(溟洲道, 현 강릉) 감창(監倉, 창고의 관리와 감독을 맡아보던 고려시대 벼슬) 김유립(金柔立)의 보고에 의하면 섬 중에 ‘돌부처, 무쇠종, 돌탑’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때 이미 울릉도에 불교가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이런 증언은 계속되어 1882년(고종 20) 검찰관 이규원(李奎遠)의 보고서에도 ‘넓은 돌을 덮개로 하고 작은 돌로 받쳐 놓은 것이 많았는데 옛날 사람의 석장(石葬)’이라 한다고 하여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19세기까지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검찰사의 증언대로 ‘넓은 돌을 덮개로 하고 작은 돌을 받쳐 놓은 석장’이라고 한다면 이 고인돌은 큰 돌을 바닥에 그대로 덮는 한반도 남쪽에서 흔히 발견되는 남방식 고인돌과 달리 북방식 고인돌일 수 있어 울릉도의 원주민은 북방계일 가능성도 있다.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현포앞 바다 노인바위와 코끼리 바위
검을 현(玄), 갯포(浦)라고 쓰는 현포의 지명은 동쪽에 있는 송곳봉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치면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고 하여 부
쳐진 이름이다.
현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 개척민들은 ‘검은작지’라고 불렀는데 배를 타고 와서 보니 대풍감에서 노인봉까지 15리나 되는 긴 몽돌해안선이 까마득하게 보였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궁궐의 터나 관아 등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노인봉 바로 아래 길가에는 두 개의 큰 바위가 있다.
좌측은 아들바위 우측은 딸 바위라고 하는 각기 돌을 던져 떨어지지 않고 구멍 속에 들어가면 아들이나 딸을 낳는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아들바위(좌측) 딸바위(우측)
현포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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