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이야기

민간외교가 안용복장군과 울릉도

이정웅 2011. 4. 28. 08:40

민간외교가 안용복장군과 울릉도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온 제 일등 공신을 꼽으라고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울릉도 주민들이다. 지금 와서 국방 상 요충지니 어업의 전진기지니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지만 1883년 고종이 16가구 54명의 개척민을 보내 섬을 개척하기 이전까지는 기존의 섬사람들이 수시로 몰려와서 고기를 잡고 산림을 벌채해 가는 왜인들을 끊임없이 몰아내면서 섬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 나라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섬을 지켜 온 그들에 대한 보상차원에서라도 주민들이 필요한 것이 비행장이든 항만시설확충이든 그 것이 무엇이든지 국비로 과감하게 지원해 주어야 한다.

 

안용복장군 충혼비

안용복장군 충혼비 안내판

안용복장군 도일 행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안용복(1654~?)장군이다. 사실 그는 수병 즉 능로군(能櫓軍)에 불과했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1693년(숙종 19) 4월 동료 40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중 왜인들을 막다가 총칼로 무장한 오오야·무라카와 집안의 어부들에게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호키주(百耆州) 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막부로부터 울릉도·독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받아왔다. 비록 돌아오는 길에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도주에게 빼앗기기는 했으나 이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일본이 공식확인한 문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이 울릉도에서 조업은 계속되어 다시 그들을 독도까지 쫓아내고 뒤 따라 일본에 건너가 항의했다. 이 때 안용복은 세금을 걷는 관리를 상징하는 깃발을 배에 달았다. 마침내 호키주에 가서 태수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賞)이 아니라, 벌(罰)이었다. 관명을 사칭하고 허락 없이 국경을 넘어갔다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영의정 남구만의 만류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697년(숙종 23) 대마도주가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막부의 문서를 보냈다. 그러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이후 철종 때까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분쟁은 없었다.

실학자 이익은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 땅이라고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울릉읍 도동 약수터 앞에는 1964년 세워진 안용복장군의 충혼비가 있다. 일개 수병에 지나

 

 

안봉복장군바위(정들포)

 

지 않던 그를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1954년 부산의 한 애국단체인 대동문교회에서 ‘독전왕 안용복 장군(獨戰王 安龍福 將軍)’ 추존 식을 가진 이후 일반화되었다.

또한 경상북도 ‘안용복장군을 사랑하는 모임’에서는 그가 처음 도착했을 울릉도 정들포 앞바다의 해태바위를 ‘안용복장군바위’로 명명했으며, 2009 4월에는 대구에서 안용복재단(이사장 노진환)설립되었다.

조정의 책임 있는 어느 누구 한 사람 울릉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시대 미천한 신분에 불과했던 그는 온 몸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내는 데 앞장서다가 포상은커녕 죄인의 몸으로 일생을 마친 불운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