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이야기

우산국패망의 전설이 가득한 남양

이정웅 2011. 9. 3. 07:54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할 때 사용했던 나무로 만든 사자가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사자 바위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100일동안 제사를 지냈다는 비파산

우해왕이 항복할 때 벗은 투구가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투구바위

 

우산국패망의 전설이 가득한 남양

 

남양(南陽)은 이름이 시사(示唆)하듯 울릉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아 햇볕이 잘 드는 곳이다. 따라서 눈도 가장 먼저 녹는다고 한다. 이런 빨리 녹는 눈을 아쉬워해서인지 울릉팔경 중에서 달밤에 보는 눈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여 ‘남양야설(南陽夜雪)’이라 했다.

원래 이름은 골계(谷溪)였다고 한다. 골짜기가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계곡이 깊어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 마을 곳곳에 우산국패망의 전설이 숨어 있으니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해상에서 강성한 해상국가을 이루었을 우산국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가 없다. 다만 512년 신라 제22대 지증왕(재위, 500-514)이 이사부(異斯夫)를 신라 최초로 실직주(강원도 삼척지방) 군주(軍主)로 임명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여다는 기록만 전해 올 뿐이다.

이 때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워 위엄으로는 항복받기 어려우므로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며 나무로 만든 사자(獅子)를 많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속여 울릉도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놓아서 밟아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 했다.

남양에는 사자바위와 투구바위, 비파산이 있는데 이 때 우산국의 마지막 우해왕이 쓰고 있던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는데 그 투구가 ‘투구바위’, 그 때 신라군들이 가져온 나무사자가 ‘사자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는 해발 340m 화산지형에서 대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산이 있다.

국수 가락처럼 생겼다고 하여 국수산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비파산(琵琶山)이라고도 한다.

우산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왕으로 전설에 등장하는 우해왕은 비록 강성한 신라에 항복한 비운의 왕이지만 용맹이 뛰어난 왕이었다. 대마도를 정복하여 도주(島主)의 항복받고 그의 셋째 딸을 데리고 와서 왕비로 삼았다. 그녀는 올 때 학을 한 마리 가지고 왔다. 그녀의 이름은 풍미녀였는데 현명한 우해왕과는 달리 사치가 심했다. 그녀의 호화로운 생활이 결국 우산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화려한 생활도 잠시 별님이라는 공주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자 우해왕은 뒷산에 올라가 병풍을 치고 100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도 슬픔에 젖은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데려온 12시녀로 하여금 평소 풍미녀가 좋아하던 학을 병풍 앞에 놓게 하고 매일 비파를 뜯게 하였다. 100일이 되던 날 학은 슬픈 소리를 내며 학포 쪽으로 날아갔다.

그 후 이 산을 12시녀들이 100일 동안 비파를 뜯던 곳이라 하여 비파산으로, 학이 날아간 곳은 학포(鶴浦)가 되었다고 한다.

남양버스정류장에서 농협 호박엿공장 쪽으로 30분 정도 걸어가면 일몰이 아름다운 남서일몰전망대가 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정면에는 남근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건너편 산자락에는 부끄러움을 타듯 뒤로 돌아선 색시바위가 있다. 이 남근바위는 기자석(祈子石)으로 정성스럽게 빌면 자식을 얻을 수 있고, 정이 없는 부부는 정이 돌아오고 자손이 번창(繁昌)한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