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환정책의 슬픈 전설과 태하
울릉도는 신라 이래 지금까지 정부의 알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일주도로가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점이 그렇고,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항만확충이 지연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만행을 저지를 때마다 시민단체는 물론 정부까지 나서서 모섬인 울릉도를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1018(현종 9) 우산국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하사한 것 이외 계속해서 수토(搜討)정책을 펴서 난파하여 머물거나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들어와서 살던 사람들을 육지로 내보냈다. 따라서 울릉도는 왜인들의 독무대가 되어 고기를 잡고 산림을 벌채해갔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논밭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다.
성하신당
만약 그 때 조정의 명에 따라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고 섬을 비워 두었다면 울릉도는 왜인(倭人)들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국제법이 말하는 실효적 지배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독도는 물론 울릉도까지 시비에 휘말릴 수 있었다. 입도한 사람들은 비록 조정의 명령은 어겼지만 결과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온 셈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정부는 울릉도주민들에 혜택을 크게 확대하고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본토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어느 전설에서도 뭍이나 조정(朝廷)을 미워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화신당에 모셔진 동남동녀의 전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태종은 김인우를 안무사(按撫使,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특사)로 임명해 병선 2척을 주어 울릉도에 파견했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태하에 도착한 그는 임무를 수행하고 떠나기 전날 꿈을 꾸었는데 해신이 이르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이곳에 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개의치 않고 출항 명령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출발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밤 꿈이 생각난 그는 일행 중 동남동녀를 골라 섬에 남겨두고 육지로 돌아갔다.
몇 년 후 다시 울릉도를 찾은 그가 두고 간 동남동녀를 찾으니 꼭 껴안은 체 백골이 되어 있었다. 그는 두 혼령을 위로하고 그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니 오늘날 성하신당(聖霞神堂)이다.
태하앞바다
광서명 각석
울릉도에서는 이 아름답고 슬픈 전설의 두 주인공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3월 1일 거도적으로 군수가 주관하여 제를 올리고 이어 3월 3일에는 태하리 주민들이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안전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울릉도 사람이라면 그가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배를 새로 만들게 되면 진수하기 전에 반드시 이 신당에 와서 안전운항과 사업번창을 기원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울릉도의 수호신인 동남동녀에 대한 제사(祭祀)가 해가 갈수록 열의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전설에서도 자기들을 버리고 육지로 떠난 김 안무사 일행을 원망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울릉도민이 잘 살 수 있도록 풍어와 안전을 지켜주는 신으로 승화하였다. 울릉도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은 이 전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은 1903년 도동으로 군청을 옮기기 전까지 군청 소재지였다. 땅이 비옥하고 어획고가 높은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대풍감을 통해 본토(本土)와 교류가 수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큰 황토 산지여서 대황토구미(大黃土邱尾)로 불려 졌는데 대하(臺霞)라고 부르다가 태하(台霞)로 변해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일설에는 안개가 많은 곳이라 하여 태하로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양질의 김 즉 해태(海苔)가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태하리로 부른다고도 한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울릉 팔경 중 하나인 태하낙조(台霞落照)가 말하듯 저녁 노을(霞)이 가장 아름다운 곳(台)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마을 남쪽에 자리 잡은 광서명 각석문(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11호)은 1889년(고종 26) 새와 쥐의 피해로 울릉군에 흉년이 들자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1824~1906)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삼척, 울진, 평해의 환곡 중에서 300석을 지원하도록 하여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자연석에 써 놓은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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