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귀화장수 두사충을 기리는 모명재
이순신 장군의 후손 이인수가 비문을 쓴 신도비 좌측
모명재 만동문
후손 두한필의 효행을 기리는 명정각
두사충이 미리 점지해 두었다는 묘터 고산서당
두사충 묘소
풍수지리서 모명선생유결 서
매부 진린 장군의 손자가 귀화해 후손들이 정착한 해남군 황조리
‘뽕도 따고 님도 보고’의 주인공 명나라 장수 두사충
대구를 알수록 독특한 이야기 거리가 많은 도시라고 생각이 드는데 수성구 만촌동 남부정류장 뒤편 형봉(안내문에는 형제봉이라고 표현했으나 형봉과 제봉은 서로 다른 봉우리이고 그 중에서 모명재는 형봉 아래에 있다. 또한 모명재를 다른 말로 형봉재라고 한 편액이 남아있다.)아래 있는 모명재(慕明齋)도 그 중 한 곳이다.
재실의 이름이 시사(示唆)하듯 명나라 장수 모명 두사충(杜師忠)을 기리는 집이다.
중국 두릉(杜陵)이 본관지인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그 해 12월 명나라가 파견한 총사령관 이여송의 참모였다.
직위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주변의 지형을 살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고 출전 시에는 적을 공략하기 쉬운 곳을 가려서 진지를 구축하는 임무였다.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이며 기주자사(冀州刺使, 우리나라 도지사급) 두교림(杜喬林)의 아들이다. 그는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정철, 류성룡 같은 당대 문신은 물론 이순신과 같은 장수들과도 수시로 작전을 협의하면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자 명군은 철수했다. 이 때 두사충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끈질긴 왜군은 그를 평안하게 놔두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직책을 비장복야문하주부(裨將僕射門下主簿)로 하여 조선에 왔다. 이번에는 매부인 도독 진린(陳璘)은 물론 두 아들을 동행했다. 이 때 바다의 영웅 이순신과도 재회하게 된다. 그 감회를 충무공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북으로 가기까지는 고락을 같이 하고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하며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밤아래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기나긴 7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도 끝났다. 다시 왔던 명의 지원군들도 모두 귀국하게 되었다. 그 역시 귀환대열에 합류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지대인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에게 눈물을 흘리며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않아 오랑캐나라가 될 명나라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맏이 산(山)과 둘째아들 일건(逸建)을 데리고 대구에 자리 잡았다.
그의 예견은 적중해 50여 년 후 한족이 오랑캐라 부르던 청에 의해 명이 망했다. 조선의 선조는 달구벌의 노른자위 땅인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그에게 하사했다. 그러나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기면서 그 땅에 감영(監營)을 짓고 두사충 일가는 계산동일대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는 뽕나무를 가꾸며 누에를 쳤다. 그 때 옆집에 마음 착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홀아비인 그는 뽕나무에 올라가 뽕을 따는 것보다 그 과부를 엿보며 연모하는데 오히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보다 못한 아들이 과부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속내를 털어 놓아 마침내 그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뽕도 따고 임도 본다’ 는 이야기는 이 일로부터 비롯되어 전국에 퍼졌으며 지금도 일대를 ‘뽕나무골목’이라고 한다.
노년이 되면서 그는 거주지를 앞산(최정산, 대덕산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 후그가 세운 대명단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앞산이 맞다) 밑으로 옮겼다. 장등산 꼭대기에 대명단(大明壇, 지금의 대구고교 자리)을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 고국의 황제를 위해 절을 하며 신하로서 예를 다했다. 오늘날의 마을 이름 대명동은 이 때 쌓았던 대명단에서 유래되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그는 일찍부터 장차 묻힐 곳으로 지금의 고산서당 일대를 잡아 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미리 보아두었던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기 위해 담티 고개에 이르렀으나 너무 몸이 쇠약해 높은 고개를 넘지 못하자 가까운 형봉을 가리키며 ‘저산 아래 계좌정향(癸坐丁向) 묻어 달라’고 하여 사후 쓴 묘 자리가 지금의 유택이다.
(담티 고개에 대해서도 두사충이 노쇠해 담(痰)이 끓어 넘지 못한데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대동여지도 등의 대장현(大墻峴), 장현(墻峴)이라는 기록과 달구벌(1977년 대구시)의 자료를 보면 당시로서는 높은 담처럼 큰 재이기 때문에 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풍수지리서인<모명유결(慕明遺訣)>이 있다. 요즘 풍수지리설이 각광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박사과정이 개설된 대학도 있는데 두사충의 모명유결을 읽지 않고는 올바른 풍수이론가라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내용이 충실하다고 한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1966년 중수한 것이다. 재실 뜰에 서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충무공의 7대손이자 삼남수군통제사(三南水軍統制使)이 이인수(李仁秀)가 썼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은 당시 고국으로 돌아갔던 매부이자 이순신과 노량해전 에 큰 공을 세운 진린 도독의 후손들도 손자 대에 와서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두사충의 예견대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손자 진조(陣詔)는 야만족인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없다며 동지 허파총과 그의 휘하에 있는 정예 수군 5인과 남오도(명의 수군기지)에서 배를 타고 서,남해 열도를 누비든 중 목포 앞 보화도에서 어부 박씨의 도움을 받아 1644년(인조 22) 완도군 고금도 묘동포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진린이 건립한 관왕묘(關王廟, 중국 삼국시대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사당)와 별묘(別廟)에 모셔진 할아버지 초상화에 배례하며 칠언시(七言詩)를 남겼다.
10여 일 후 식량을 싣고 같이 왔던 허파총 등 6인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진린의 손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사실과 그가 남긴 칠언시를 전하니 <남오현 문물지>에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후 진조는 경주 이씨 성원(誠源)의 딸과 결혼하여 구석리에 살다가 해남 땅 해리로 이사 스스로 ‘명을 그리워 한다’는 뜻으로 아호를 사명(思明)이라 하고 14살 된 외아들 석문(碩文)을 남기고 돌아갔다.
홀로된 석문은 가세를 크게 일으켜 해남 산이반도 즉 산이면에 터를 잡아 ‘황제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후예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황조리(皇朝里)하고 대명재(大明齋)를 세워 자녀들에게 충·효·례를 가르쳤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대명재는 사라졌으나 선조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사법시험합격자가 많고 황조별묘에는 진린의 초상화와 위패가 모셔져있다. 또한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진린의 고향 중국의 광동성 옹원현과 해남군이 1991년 자매결연을 맺어 한중우호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본관을 광동(廣東), 시조는 진린으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이로 인해 중국의 두 명문, 두릉 두씨와 광동 진씨가 조선에 귀화하여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 우리나라 국격이 높아진 점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처남 매부지간이어서 더 특별하다 하겠다.
* 추신
대명단의 위치를 필자는 대구고교설을 주장했으나 최근 택민국학연구원 (원장 김광순 교수)에서 발행한 "대구남구의 문화유산(2008)" 에 의하면 14대 종손 두남택(杜南澤)의 "모명선생래한사기발(慕明先生來韓 史記跋)"에서 기록을 발굴하여 경마장 서쪽 즉 대명 11동 306번지 일대에 "대명단"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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