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기행(黃山紀行)
칠곡향교의 임원들과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원 등 21명이 황산과 무이산을 답사했다. 주자의 유적지가 있는 무이산이 주목적이었으나 너무 학술적인 곳만 가면 재미가 덜하다는 의견이 있어 볼거리 차원에서 끼어 넣은 곳이다.
그러나 안휘성의 황산(黃山)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최고의 명산이었다. 명(明)의 지리학자 서하객(본명: 굉조(宏祖))은 황산의 아름다움을 일러 ‘오악귀래 불간산(五岳歸來 不看山), 황산귀래 불간악(黃山歸來 不看岳)’ 즉 ‘오악에 다녀오면 다른 산들이 보이지 않고, 황산에 다녀오면 오악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을 만큼 명산이다.
또 청나라 때 사람 조사길(趙士吉)은 황산의 기송(奇松), 괴석(怪石), 운해(雲海), 온천(溫泉)을 황산의 사절(四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016년 8월 16일 12시 15분 중국국적의 동방항공을 타고 대구공항을 출발해 13시 50 분. 상해 푸동공항에 내렸다. 명물 동방명주와 밀랍관을 관람할 계획이었으나 현지 가이드의 말이 황산시까지 5시 30분 소요되는데 비해 다음날 이른 아침 일찍 황산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가는 것이 낫다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버스에 승차. 주변 풍경을 느긋하게 보면서 갔다. 위도 상으로 타이완이 가까워 그런지 난대수종 특히, 대나무가 울창한 산이 많았다. 주택도 거의 2층으로 말끔한 것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보다 잘 사는 것 같았다. 가이드의 말이 정부에서 지어주고 입주자는 사용료만 낸다고 한다.
어둑할 무려 황주시에 도착 했다. 한(韓)식당에서 삼겹살로 저녁을 먹고 파크뷰호텔에 짐을 풀었다. 5성급호텔이라고 하나 냉장고가 없어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나 대기해 둔 버스에 타고 도시락을 하나씩 받고 황산으로 출발했다. 8시경 도착했는데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줄을 서서 오랜 기다린 끝에 케이블카를 탔다. 사절(四節)의 하나라는 기송(奇松)을 촬영하려고 하였으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 창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종점에 도착해 도시락을 먹으며 잠시 쉴 때 거대한 암봉(巖峰)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찍을 있었다. 곧이어 서해대협곡의 모노레일을 타려고 하니 모두 하산하라고 했다.
내려가는 깊 섶에 뻐꾹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돌마티리, 모싯대도 보였다. 더 내려가니 땅두릅, 며느리밥풀꽃 엉겅퀴도 있었다. 지구가 원래 하나의 덩어리였으나 지각변동으로 대륙이 나눠졌다는 사실을 같은 종의 식물이 한반도에서 수 천리 떨어진 이곳에 자라는 것에서도 입증되는 것 같았다. 따라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교통, 통신수단의 발달로 세계가 이웃 마을과 같다는 최근 회자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산 길은 한 발자국만 잘 못 디뎌도 목숨을 잃을 정도의 벼랑길 즉 잔도(棧道)였다. 폭도 좁아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만나면 비켜 서 있다가 내려가야 했다.
몇 년 전 척추전방전위증을 시술(施術)한 적이 있어 가뜩이나 다리가 부실하고, 고소공포증마저 있어 포기하고 뒤돌아가려고 했으나 그럴 수도 없다고 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비슷한 처지의 배(裵)회장과 함께 어떻게 하든 내려가서 택시 등 다른 교통수단이 있으면 이용하자 하고 아래는 처다 보지도 않고 암벽만 보며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갔다. 그러나 내려가서 보니 그곳은 깊은 골짜기라 외부로 나가는 길도 교통수단이 없었다.
다시 모노레일을 타니 이번에는 또 올라간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 봉우리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 산 중턱 예약해 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또 올라가서 반대편 운곡케이블카로 하산한다고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런 험한 산인 줄 알았으면 포기했을 것인데 그렇게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시쳇말로 빼도 박도 못 하는 처지라 또 오르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쉬면서 천천히 올라 일행과 합류해 기념사진을 찍고 식당이 있는 곳까지 간신히 내려갔다.
그러나 하산하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는 또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야한다고 한다. 마침 가마꾼이 있어 배회장과 나, 황 선생 부인은 우리 돈 7만 2천원의 가마를 탔다. 험난한 길을 힘들게 걸었던 황산 기행이었다. 그러나 일행 중 낙오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비록 다리가 더 아파 남은 4박 5일의 일정 중 무이산 주자(朱子) 유적지 답사를 소화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돌이켜보니 참으로 유익한 모험(?)이었다. 칠십을 넘긴 나이라 다시 가볼 수 없을 중국 최고의 명산 황산을 종주한 것은 내 일생에 지워지지 않을 좋은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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