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중국에서 보다 더 사실적인 진주 도통사(道統祠)의 주자(朱子) 진상(眞像)

이정웅 2016. 9. 19. 18:04

 

주자상 중국 무이시 무이정사 소장

주자상 주희 생가

주자동상 무이정사

진주 도통사의 주자 진상 (眞像), 얼굴에 북두칠성 점이 있는 가장 사실에 가깝게 그려진 진상

 

 

진주 도통사

 

 

중국에서 보다 더 사실적인 진주 도통사(道統祠)의

주자(朱子) 진상(眞像)

공자와 주자, 안자의 진상을 모시고 기리는 도통사(道統祠)는 경남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724번지에 있다. 원래 대평면 하촌리에 있던 것을 남강댐 공사로 199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칠곡향교 유림일행의 선현 유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진주성과 촉석루 등을 보고 들렸다. 특별히 알려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당초에는 답사대상이 아니었으나 장의 안희두 님이 추천하였고, 공교롭게도 미리 자료를 준 것이 회강(晦岡) 안명식(安明植)의 <도통사전말기, 이하 전말기라 한다>였다.

<전말기>에 의하면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서 태극(太極)을 만세에 세우고서 천하의 대도를 행하여 여러 성인(聖人)을 집대성한 자는 지성(至聖)선사이신 공자(孔子)이시고, 아성(亞聖)의 자태로서 도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여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후인을 계도하여 성현을 집대성한 자는 문공(文公)이신 회암(晦菴) 주자(朱子)이시며, 공자를 원조로 삼고 주자를 종사(宗師)로 삼아 성리학을 맨 먼저 밝혀 동방에 만세의 연원(淵源)을 열개 한 자는 문성공(文成公)이신 회헌(晦軒) 안자(安子)이시다.’

또 ‘1909년 겨울 <안자실기>를 간행하는 일이 끝나고 -- 1912년 이상복(李相福)과 안낙진(安洛鎭)으로 하여금 황해도 장단(長湍)의 영모당에서 안자의 진영을 가져오게 하여 1913년 영정각을 세우고, 중국 궐리사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왔으며 공자께서 제자를 가르치는 진상을 궐리(闕里)로부터 받들고 왔고, 장례원(掌禮院)의 부경(副卿)인 채용신(蔡龍臣)이 안자의 유상(遺像)에 다시 색칠하게 하여 공자를 중앙에, 주자를 배향하고 안자를 종사(從祠)하고 그 이름을 도통사라고 하고 문은 태극문, 현판은 공자의 76대손 연성공 공영이(孔令貽)가 썼다.’

‘1934년 강당을 크게 증축하여 동문당(同門堂)이라하고, 동문당의 현판과 창평일월(昌平日月), 자양강산(紫陽江山), 여덟 글자는 연성공 공영이의 아들 공덕성(孔悳成) 썼다. 그 후 중국의 곡부의 궐리와 진주의 연산(硯山)은 오래 동안 서신 교류가 있었다.’

‘동쪽 광명각에 공자, 주자, 안자의 연보(年譜)와 안자실기, 기묘명현록의 판본을 소장하고 --창사비(創祠碑)는 중국 복건성의 무이오곡에 있는 자양서원(무이오곡에는 자양서원이 아니라, 무이정사가 있다. 무이정사의 잘못인 듯?)의 집재(緝齋) 주경희(朱敬熙)가 짓고 비두(碑頭)의 전자(篆字)는 승지 정승현이, 비문은 퇴계의 종손 이충호(李忠鎬)가 썼다.

‘도통사의 남쪽 바위의 전면에 경(敬)자는 소수서원의 신재 주세붕의 필적인 ‘경’자를 본떠서 새겼다.---아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도(道)도 또한 변하지 않나니 모든 군자들은 어찌하여 힘써야할 바의 길을 생각하지 않으랴’라고 끝을 맺었다.

따라서 이 <전말기>를 통해 우리가 유학의 맥을 잇기 위해 교통편이 열악했던 그때 천만리 머나먼 중국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그려오고, 우리나라에 처음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의 진영을 황해도 장단에서 가져오게 하였으며 주자와 퇴계의 후손을 참여시켜 조선 유학의 본거지로 만들고자 했다는 점과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모든 물산이 열악했던 그 때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우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해 잘 모르는 필자는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들으며 일행이 준비해간 제수로 제를 올릴 때 참가했을 뿐이었다. 그 후 기회가 있어 중국 복건성 주자(朱子)의 유적지를 방문한 일이 있어 생가와 무덤, 무이정사를 돌아보며 주자상과 주자 동상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설명한 -주자는 태어날 때 얼굴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이 있었다는 -것과 달리 어느 그림이나 동상에도 얼굴에 점이 없는데 반해 오래 전에 보았던 진주 도통사의 진상은 점이 있어 가장 사실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자학 역시 조선의 주류학문으로 율곡과 퇴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궁구하며 실천하려고 했고 심지어 주자가 경영한 무이구곡을 본 따 고산구곡이나 도산구곡을 설정하여 생활모습까지 닮으려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렇게 존숭 받는 주자가 중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학자라는 것을 이번 답사로 알았고, 진상(眞像)도 중국 현지에 있는 것보다 우리 것이 더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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