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개국 1등 공신 복지겸의 딸이 심은 것으로 전해오는 수령 1,100여 년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51호)
은행나무 표석
복지겸장군의 딸이 처음 만들어었다는 두견주(국가무형문화제 제86-2)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면천 은행나무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생사를 걸고 싸웠던 격전장 팔공산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몇 개 코스의 “왕건길”을 만들어 여가를 즐기고 있는 대구사람들은 왕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한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고구려 궁예 수하의 일개 장수였던 왕건(王建)을 일약 고려 태조로 추대한 혁명의 주역들에 대해서는 깊이 모른다.
『고려사』 열전 “선혜왕후 류씨”조에 기병장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태조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몰아내고) 왕을 교체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자 선혜 왕후가 손수 갑옷을 가져와 남편(왕건)에게 입혀주었으며 여러 장군은 그를 옹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했고, 또 열전 “홍유” 조에도 ‘복지겸 등이 그(왕건)를 부축하고 나가 노적가리 위에 앉게 하고 군신의 예를 거행하였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
이에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을 모두 1등 공신으로 서훈하고 금은제그릇, 비단옷과 비단 이부자리, 비단천을 주었다.’ 고 해 다른 장수와 더불어 복지겸도 혁명의 주역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조에서는 마군장군 환선길(桓宣吉)이 반란을 도모하려는 것을 왕에게 알려 척결토록 하였고, 역시 마군장군이었던 공이 순군리 임춘길, 청주 사람 배총규, 전남 장흥 사람 강길·아차귀와 충북 회인(懷仁) 사람 경종 등의 반역을 모의하는 것을 적발했다고 했다.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면천군편 인물 조에 “복지겸은 당나라로부터 본군(면천군)으로 와서 살던 복학사(卜學士)의 후손이다. 처음 이름은 사괴(砂瑰)로 배현경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 개국공신이 되어 본 주의 토지 3백 경(頃, 180만 평?)을 하사받아 자손이 대대로 먹고 살았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라고 해서 그가 중국계 귀화인의 후손이자 고려 개국 1등 공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이 네 분의 공신 중에서 유일하게 나무를 남긴 분이 복지겸(卜智謙,?~936)이다. 물론 직접 심은 것이 아니라, 딸이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복지겸은행수(천연기념물 제551호)”로 불리며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지겸이 노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와 원인 모를 병을 얻어 눕게 되었고 그의 어린 딸 영랑이 날마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신령님께 빌었다. 그러다 이상한 힘에 끌려 잠에 취했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은행나무 두 그루를 구해다가 뜰에 심고, 앞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따와서 안샘물로 술을 담가 그 술을 백일동안 익혀서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복지겸 장군의 병이 거짓말처럼 낫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은행나무는 아직도 건재하며, 술은 면천두견주(沔川杜鵑酒)라는 이름으로 국가무형문화재(제86-2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연한 황갈색이고 단맛이 나며 점성이 있는데 신맛과 누룩 냄새가 거의 없고 진달래 향기가 일품이다. 알코올 도수는 21도 정도이다.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피로회복에 효과가 있으며, 특히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어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태어난 충남 당진은 고려 개국 1등 공신 복지겸의 본향이기도 하다. 특히, 무공공의 대를 이은 후손들로 나이 18세에 궁예(弓裔)의 위사(衛士, 경호원?)가 되어 뒤에 고려 태조를 섬겨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고 엄의(嚴毅)라는 시호를 받고 혜종 묘정(廟庭)에 배향된 복지유(卜智柔), 1291년(충렬왕17) 원(元)나라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원주 방호별감(原州防護別監)으로 이를 물리쳐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이 고을을 지면천주사(知沔川州事)로 승격시킨 복규(卜奎), 1465년(세조 1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봉교(奉敎)를 거쳐, 1472년(성종 3)에는 효심이 널리 알려져 정표(旌表)를 받고, 1474년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147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 그 뒤 1489년(성종 19)에는 광흥창수(廣興倉守)로 신료들의 인정받아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추천되고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려고 하자 그곳의 부민(府民)들이 연임해줄 것을 상언(上言)할 정도로 고을을 잘 다스렸던 복승정(卜承貞) 등 후손들은 면천을 빛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무공공 역시 “충남의 대표 호국 인물 100”의 한 분으로 공을 기리는 무공사(武恭祠)가 건립되어 후세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딸이 아버지 무공공의 병을 낫게 하려고 개발한 두견주가 지역의 대표 특산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하지만 1,10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겨 줄기가 일부 썩고 있음에도 주민들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꿋꿋이 자라고 있는 “복지겸은행수”가 당진군을 상징하는 나무로 기려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이씨 국동문중 재사 유화당의 애국설 현판 (0) | 2019.11.02 |
---|---|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양 관영(官營) 차밭 (0) | 2019.10.07 |
우리나라 서원의 모델 백록동서원 계수나무 (0) | 2019.07.22 |
화원동산의 모감주나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0) | 2019.06.27 |
중국 강서성 여산박물관의 박태기나무 (0) | 2019.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