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인천이씨 국동문중 재사 유화당의 애국설 현판

이정웅 2019. 11. 2. 07:17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문중의 재사 유화당 안에 150여 년 자라고 있는 황국, 이 국화로 국화주, 국화차를 만들고 범국회를 열었다고 한다.

 

화암 이해준이 쓴 주돈이의 애련설에 버금가는(?) 애국설 현판

 

1864년(고종 1)에 건립 화암 이해준이 건립한 유화당 당호 유화(有華)는 꽃이 있는 집을 말한다. 종부가 지키고 있다.

 

대구에서는 유일한 솟을 대문형 정효각

 

효자 이희성과 이희효형제에게 내린 정효문

 

인천인 이성량(李成樑) 선생의 애국설(愛菊說)

 

 

 

옛 선비들은 매화, 난초, 대나무와 더불어 국화를 사군자라 하여 좋아했다. 특히, 도연명(陶淵明, 365~427)귀거래사중에서 뜰 안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가 무성하나(三徑就荒) 소나무와 국화는 변함이 없다(松菊猶存).”음주 20중 제5동쪽 울타리 밑 국화를 따서(采菊東籬下),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悠然見南山).”라는 구절에서 그의 남다른 국화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주돈이(周敦頤, 1017~1073)애련설에서 나는 생각하건 대 국화는 꽃 중에 은자이고,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라고 여겨진다. !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에 또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드물며,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같은 자가 몇이나 되는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당연히 많을 것이다(予謂菊 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者也. 噫 菊之愛 陶後 鮮有聞, 蓮之愛 同予者何人, 牧丹之愛 宜乎衆矣).”라고 한데서 도연명의 국화 사랑은 더욱 믿어지게 했다. 퇴계 역시 국화를 사랑해 도산서당 옆에 절우사(節友社)’를 조성해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고 한 편의 시()를 남겼다.

 

도연명의 동산은 솔·국화·대 셋인지라, 松菊陶園與竹

매화 형은 어찌하여 그 속에 못 들었나? 梅兄胡奈不同參

나는 이제 매화를 넣어 벗을 맺었노니, 我今倂作風霜契

굳은 절의 맑은 향기 너무 잘 알았다오. 苦節淸芬儘飽諳

 

이 시는 나도 국화를 사랑하지만, 매화에 대해서 그렇지않은 도연명(陶淵明)을 은근히 비난(?)했다. 이런 면에서 도연명은 국화, 주돈이는 연꽃, 퇴계는 매화를 유난히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도연명은 국화를 좋아함에도 주돈이의 애련설처럼 애국설(愛菊說)을 짓지 않았다. 그런 데 대구의 한 선비 간재(澗齋) 이성량(李成樑, 1624~1720)은 그들의 반열에 들기에는 격이 낮다고 하겠지만 애국설(愛菊說)을 남겼다.

 

물과 뭍에 있는 초목의 꽃은 모두 봄에 피어 혹 붉고 혹 희면서 향기로써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모란을 사랑함은 부귀한 사람들이 많고 연꽃을 사랑함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다. 파릉(灞陵)의 매화()는 혜원당(惠園堂)의 문장에서 많이 취하였다. 그러나 국화(菊花)는 꽃 중에 은자(隱者)의 모습을 지녔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그 꽃의 황금빛은 중앙의 바른 색을 잃지 않았고, 그 향기는 오랫동안 머물러 홀로 중양절(重陽節) 늦게까지 향기를 보존하니, 채마밭 가꾸는 늙은이는 깊어가는 가을날 그 명성을 절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일찍이 이름난 울긋불긋한 꽃과도 화려함을 다투지 않았고 또 당시 사람들이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에 관심 두거나 믿지 않았으니 그 모습은 본래부터 맑은 것이었다.

나는 매우 용렬하여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구하고 싶지 않아서 이에 은둔(隱遁)하기로 작정하고 고을 동쪽 국동(菊東) 상국리(上國里)에 집을 마련하였다.

과연 이보다 앞서 어떤 사람이 국화가 사랑할 만한 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고을의 이름을 국동(菊洞)이라 지었겠는가? 당시에 국화(菊花)를 심은 사람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국화(菊花) 몇 떨기가 무성한 숲속에서 뒤섞여 자라고 있었다. 내가 마침내 막힌 곳을 트이게 하고 주변을 잘 정리한 후 10() 뿌리를 구해서 더 보태어 심었다. 가을에 이미 꽃이 피었는데 꽃이 번성(繁盛)하여 사람과 꽃이 더불어 그 향기를 함께 맡을 수 있었기에 사랑하는 마음 끝이 없어 마침내 이설()을 짓노라.

 

을해(乙亥: 靑猪) 중양절(重陽節) 간하병창 (澗下病傖) 국동서실(菊東書室)에서 쓰노라.”

 

愛菊說

水陸草木之花皆發於春 而或紅或白 芳菲爭媚 牧丹之愛 富貴者衆矣 蓮之愛 惟君子能之 灞陵梅 惠園堂文章多取之 而菊是花之隱逸也 愛之者鮮 而其華黃不失中央之正色 其香遠 獨保重陽之晩節 則老圃深秋其名自重 曾不爭榮於名花之紅白 亦不關恃於時人之愛不愛 而其容也固澹如矣 余甚劣不欲干進於世 仍作隱遁計 僦室于郡東菊洞上國里 果未知前此 何人能知菊之爲愛 而以名其洞歟 時無栽菊者 猶有菊叢枝三本 雜生於所居屋東畔林薈中 余遂疏而治之 加得十餘本 幷栽之 秋旣花 花繁人與花可以同得其香矣 愛不可不旣 遂爲之說

 

歲靑猪 重陽節 澗下病倡 書于菊東書室

 

김천의 권오웅 박사가 국역을 해주었다. 송은석(대구문화관광해설사)1695(숙종 21) 중양절에 간하병창(澗下病傖) 시골에 사는 늙고 병든 이간재(澗齋)가 썼다고 했다. 유화당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화주와 국화차를 빚어 범국회(泛菊會)”를 열렸다고 한다. 주돈이의 애련설에 버금가는(?) 애국설을 남긴 문사 간재가 이웃에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문중의 칠곡 입향은 18세 참봉 이공전(李公詮)으로부터 비롯된다. 세조 때 영남으로 내려와 1500년 초중반에 팔거현 갈밭(蘆田, , 북구 태전동)에 정착했으며 22세 간재(澗齋)가 국동(菊洞) 즉 현, 북구 도남동으로 옮겨 대를 이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