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목사를 지내고 아우 도계 임영, 첨모당 임운과 함께 학덕과 효행으로 은진임씨를 영남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갈천 임훈의 초상
갈천 임훈, 도계 임영, 첨모당 임운 삼형제가 학문을 닦고 우애를 다진던 갈계숲
갈천 임훈의 생가 사랑채(경남 민속문화재 제9호)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은진인 임훈선생과 거창 갈계숲
지리산과 덕유산이 군(郡)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함양과 거창은 어느 곳 한 군데 수려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중에서 이름난 명승지가 있으니 이른바 “안의 3동(安義三洞)”이다. 즉 함양군의 서하면 안의 계곡의 화림동(花林洞), 안의면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 거창의 위천, 북상면 원학동(猿鶴洞)은 대구의 삼덕동이나 부산의 남포동과 같은 행정단위의 동(洞)이 아니라, 동천(洞天)의 준말로 산과 내로 둘러싸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 즉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따라서 동천마다 특색이 있으나 원학동은 명승 (제53호)의 수승대와 더불어 초계정씨(草溪鄭氏), 거창신씨(居昌愼氏), 은진임씨(恩津林氏)의 집성촌이 있는 것이 특별하다. 이들 문중은 각기 충신, 효자, 학자. 관리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향촌 사회는 물론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그중에서 원학동 끝자락에 자리 잡은 갈계리의 은진임씨 문중은 2ha(2,000평)의 원림(園林)을 누대에 걸쳐 관리 온 점이 여느 문중과 다르다. 처음 갈계마을에 정착한 사람은 의령 현감을 지낸 임천년(林天年)이다. 이후 은진임씨 의령공파가 형성되었다.
입향조의 손자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 1478~1561)과 그의 아들 대에 와서 기반이 더욱 튼튼 해 지는 데 석천의 맏아들 임훈(林薰, 1500~1584)과 둘째, 임영(林英, 1514~1544), 셋째 임운(林芸, 1517~1572) 삼 형제다. 맏형 임훈은 아호가 자이당(自怡堂) 또는 갈천(葛川)으로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했다. 1553년(명종 8) 성균관의 추천으로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오래지 않아 사표를 내고 낙향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1561년(명종 16) 그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60세 넘는 노령임에도 여막(廬幕)을 짓고 삼 년 동안 한 번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 일이 경상도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의 장계로 1564년(명종 19) 아우 임운과 함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566년(명종 21)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언양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군역, 조세, 공물 제도 등 6가지 폐단을 조목조목 상소하여 시정했다.
이후 비안, 지례 현감과 장악원 정(正) 등을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광주(光州) 목사로 토지의 경계를 바로 잡아 세금을 균등하게 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다가 별세했다. 용문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갈천집(葛川集)』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둘째, 임영(林英)은 아호가 도계(道溪)로 인의(仁義)를 어기지 않아 해동의 안자(顔子)로 불리고 효우(孝友)가 뛰어났으나 31세로 별세했다. 셋째 임운(林芸)은 아호가 첨모당(瞻慕堂)인데 형 임훈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고 정인홍에게 배웠다. 1567년(명종 22) 이조의 특별 천거로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어 이후 집현전, 경기전, 연은전 참봉을 지냈다. 1572년(선조 5) 근무지에서 병사했다. 이조참의와 대사헌에 추증되고 용문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첨모당집』 이 있다. 손자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1586~1657)는 1635년(인조 13) 동계 정온의 천거로 대군사부(大君師傅)로 제수되었는데 남명학파의 일원으로 경상우도에서 명망이 높았다. 갈천동 은진임씨는 이들의 효우와 학행이 알려지면서 영남지역의 명분가 반열에 올랐다.
삼 형제가 일군 갈천리 갈계숲은 이들이 소요(逍遙)하며 우애를 쌓고, 독서와 사색하던 500여 년 전에 조성된 숲이다. 한국전쟁 시 황폐해질 수 있었고, 새마을 열풍이 불 때 전답으로 개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잘 보전하여 수고 22m 정도의 200~200년생 소나무, 느티나무, 물오리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고 숲속에는 삼 형제를 기리는 가산성, 도계정, 병암정 등 누각형태의 정자가 숲과 어울려 특이한 경관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갈계숲이 산림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한 당국이 <산림유전자보호림(2011)>으로 지정하고, 거창군이“ 거창 3경”으로 선정했다. 한 문중이 비록 조선(祖先)의 혼이 깃 던 숲이라고 해도 이렇게 오랜 기간 정성스럽게 관리해 온 사례는 전국적으로 그리 흔하지 않다. 거창을 찾는 많은 관광객은 원학동 입구의 정온 종택이나 황산 전통마을, 수승대만 돌아보고 갈 뿐 갈계숲은 잘 찾지 않는다. 대체로 홍보가 부족한 데 따른 것일 것이다. 큰 길가에 있고, 마을의 갈천 임훈 종택(경남 민속자료 제9호)과 아우 첨모당 임운의 서간소루(경남문화재자료 제252호)를 연계한다면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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