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세조와 정이품송

이정웅 2019. 12. 7. 15:19


합천해인사존상도(전세조대왕 진영, 경남 문화재자료 제331호)

 국립수목원 전  표지석

정이품송(우리나라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벼슬이 높은소나무)

세조 비, 정희 왕후가 봉선사에 심은 느티나무

세조(오른쪽) 정희황후(왼쪽)릉

단종이 걸터 앉았다는 청령포 관음송

세조와 정이품송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 518년 중 연산과 더불어 패악(悖惡)의 군주로 회자 되는 분이 세조(世祖, 재위 기간 1455~1468)이다. 유약한 단종을 보좌하는 이른바 고명대신들이 과도하게 국정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1453, 10월 권람, 한명회 등을 모사로 삼고,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동원해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을 비롯해 조극관, 이양, 조수량 등 조정의 핵심인물들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 거나, 죄를 물어 제거하고 안평대군마저 모반의 죄명을 씌워 강화로 축출한 뒤 사사(賜死)하니 이 정변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이후 스스로 영의정 겸 이·병조판서에 올라 내정은 물론 병권까지 장악했다. 이와 달리 힘없는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수양대군은 우의정 한확(韓確) 등을 앞세워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1455(단종 3) 6월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되었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권획득은 뜻 있는 신하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니 성삼문을 비롯한 일부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결사를 도모한다.

세조와 세자를 암살하기로 하고 명나라 사신들을 맞아 크게 연회를 열기로 한 1456(세조 2)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칼을 차고 왕과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을 기회로 실행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별운검(別雲劍, 두 사람이 큰 칼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2품 이상의 임시 관직)을 들이지 않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이 죽임을 당하니 훗날 사림들에 의해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집권한 세조이지만 몇 가지 업적도 있다,

첫째, 재상의 권한을 축소 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양반들의 자치조직인 유향소를 폐지하여 토호 세력을 약화(弱化)시키는 한편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둘째, 호적, 호패 제도를 강화하고,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五衛) 제도로 개편하여 국방력 신장에 힘썼다.

또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평안도) 개척에 힘쓰는 한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평안, 강원,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여 국토 균형 발전에 힘썼다.

셋째, 과전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 현직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제)을 실시하여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궁중에 잠실을 두어 비()와 세자빈(世子嬪)으로 하여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등의 농업 관련 서적을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넷째, 불교를 숭상하여 1461(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등 불경을 간행하게 했다. (두산백과 참조)

그름에도 불구하고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중종 이후부터 사육신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되었고 왕조시대가 끝난 1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는 임업발전(?)에도 기여(寄與)하였으니 그의 묘원 2,420ha 1,119ha의 광릉(光陵, 사적 제197)이 우리나라 산림생물종에 대한 조사, 수집, 분류 및 보전, 희귀 특산식물의 보전 및 복원, 국내외 유용식물자원의 탐사 및 이용기술의 개발, 산림환경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립수목원이 되었다.

국립수목원은 목본 1,863(자생종 292), 초본 1,481(자생종 691), 열대식물 3,000종 등 모두 6,044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세조는 충청도 보은의 한 소나무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 정이품(正二品)을 부여했고 (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9),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 생활할 때 걸터앉았다는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도 그로 인해 연유된 이름이며, 부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먼저 간 그를 기리고 능침을 보전하기 위해 머물렀던 경기도 포천의 봉선사에는 왕후가 직접 심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즉 세조로 인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수목원과 천연기념물 소나무 2그루, 그리고 어느 왕보다 금슬(琴瑟)이 좋았던 정희왕후가 심은 느티나무를 남긴 것은 참 흥미로운 왕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세조는 죽음에 이르러서 묘역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함부로 베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해 폭력성 화신 같았던 그의 다른 한 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