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의 영수 청음 김상헌이 낙향하여 제자를 모아 강론한 강린당 담장 비탈면에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어린 싹
강린당 전경, 문화재로 지정도지 않음이 아쉽다.
청음이 이곳 서미리에 은거할 때 살던 초가의 당호 목석거가 무너져 내리자 7대손 김학순(金學淳)이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1830(순조 30) 옛터를 기리기 위해 자연석 위에 빗돌을 세우고 비각를 지어 놓은 것이다.
청원루(淸遠樓, 경북 유형문화재 제199호),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이다.
가노라 삼각산아로 시작되는 ----청음의 시비
서미리마을 원경
척화파의 영수 김상헌 선생과 풍산 서미리 강린당 회화나무
대구향교 청년유도회원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비들을 찾아서 이들의 선행을 초중등학생들에게 널리 알려 인성교육에 활용하고자 애쓰고 있는 조기훈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인 송준목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을 받았는데 그곳에 가보자고 했다. 늦은 봄이었다. 몇 번의 차로를 변경한 끝에 안동 풍산 서미리를 찾았다. 풍산이라고 하면 넓은 들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골짜기였고 마을 뒷산에 우뚝 솟은 바위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안길을 들어가니 고가(古家)가 보이고 그 위쪽에 사진으로 보았던 목서거(木石居) 각자(刻字) 바위 위에 비각이 위태하게 서 있었다. 고가는 강린당(講麟堂)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낙향하여 제자를 모아 강론하던 곳이며, 목석거 유허비는 청음이 이곳 서미리에 은거할 때 살던 초가의 당호였는데 무너져 내리자 7대손 김학순(金學淳)이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1830(순조 30) 옛터를 기리기 위해 자연석 위에 빗돌을 세우고 비각를 지어 놓은 것이다.
서미리는 원래 아름다울 미(美)였는데 청음이 백의 ·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은 사실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하여 고사리 미(薇)로 고쳐 서미리(西薇里)가 되었다고 한다.
선비의 옛집이나 향교, 서원, 유가 등에 심어진 나무는 대게의 경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 행단(杏壇)에서 유래된 은행나무나 공자가 수식(手植)한 회(檜)나무에 빗댄 전나무나 향나무, 그 외 학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등이 심어 져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찬찬히 살펴보던 중 서쪽 담장 비탈면에서 한 뼘쯤 되는 회화나무 어린싹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지름이 깨 큰 나무에서 돋아났다. 그러면 그렇지 학자이자 청에 항복하려는 문서를 찢으며 자결을 시도한 충신이 강학한 곳이라면 반드시 그의 흔적이 베인 나무가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적중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잘라냈다. 태풍이나 폭우로 넘어지면 건물이 훼손되거나 사람이 다칠 우려 때문이려니 생각이 드나 가지를 치거나 솎아서 예방할 수 있는데 그럴 방도를 찾지 아니하고 손쉽게 베어낸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 돋아 난 가지 몇 개를 계속 키우면 또 자란다. 다시 몇백 년이 지나면 그때 수형(樹形)을 조절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려 소산리 청원루(淸遠樓, 경북 유형문화재 제199호)에 들렀다. 청음의 증조부 김번(金璠,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청음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굴욕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반대한 척화파의 영수로 청나라의 병력 지원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인조 18) 심양으로 붙잡혀가 6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으나 끝내 절의를 지키자 그의 높은 충절을 가상히 여겨 1645년(인조 23) 풀려난 뒤 중수할 때 이름도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했다고 한다.
당초 2채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한 채가 홍수로 허물어져 현재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2019년도 저물어가는 11월 15일 신문(매일신문)을 보고 몹시 흥분되었다. “안동 청원루는 1618년경(1645년의 오기?) 김상헌에 의해 본향인 풍산 소산마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건립됐다. 김상헌은 청서파의 영수로 조선 유학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큰 인물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 청나라에 끌려가 참형에 처형된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 삼 학사와 함께 갖은 곤욕을 치른 인물이다.
이 누정은 경상도지역에서 드물게 ‘ㄷ’ 자 평면 구성을 띠는 매우 희귀한 정자형 별서(別墅) 건물이며 17세기 향촌 사회 유력 가문의 건축형태를 엿볼 수 있는 시대성과 계층성이 반영된 연구자료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며 보물로 지정될 것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소산마을 앞 넓은 생태공원에는 청음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그 소회를 읊은 시의 빗돌이 우뚝 서 있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 고국산천(古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명시(名詩)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국민 애송시가 되었다. 1652년(효종 3) 83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전국 14개 서원에 향사되었다. 저서로 『청음집』 『남사록』 『남한기략』 등이 있다. 베어버려도 죽지 않고 새로 가지를 낸 서미리 강린당의 회화나무 새싹은 어쩌면 그가 낙향하여 직접 설계했던 청원루가 보물로 승격되는 낭보의 조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력을 감안하지 아니하고 명분만 앞세웠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는 한 시대 나라의 존망을 온몸으로 헤쳐나고자 한 충신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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