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으로 추정되는 조병준이 심은 계화 즉 계수나무
소수서원의 모델인 백록동서원
서원내 주자 상
이발이 키웠다는 백록
팔거역사문화연구회 회원 일동
우리나라 서원의 모델 백록동서원 계수나무
중국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찾았다. 우리나라 사학(私學)발전과 인재양성에 크게 영향을 끼친 주자(朱子, 본명 주희(朱熹)가 설립한 백록동서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신라나 고려 시대에 학문을 장려한 교육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추진한 나라는 조선이다. 태조는 성균관 설립과 더불어 1 고을, 1 향교 설치를 의무화했다. 그 결과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300여 개소(현, 234개)에 이르렀다.
입학 연령(年齡)은 16세였고, 정원은 부(府), 목(牧)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縣)은 30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반 자제 이외에는 쉽게 입학할 수 없었다.
이 불평등한 제도를 보완하는 방편으로 사학(私學)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첫 번째로 시도한 사람이 풍기 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이다. 1541년(중종 36)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을 건립하고 안향(安珦)의 영정을 서울 종갓집에서 풍기로 모셔오고 1545년(중종 40)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즉 사립교육기관이다.
1550년 (명종 5년) 퇴계 이황이 군수로 내려와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의 친필 편액과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 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서원이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시초이며, 관이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시작되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이라는 3개의 타이틀(Title)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교육기회가 확대되는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폐단도 발생하게 되니 대원군이 선비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630여 개 서원 중 47개만 존치 시키고 나머지는 훼철했다.
이 47개 서원 중 소수서원을 위시해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9개 서원이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형태로 지속 되고 있는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 된다”고 평가받아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신재(愼齋)의 서원 건립은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주희(朱熹)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델로 했다.
백록동서원은 우리나라(중국) 고대에 가장 평판이 좋은 고등 학부로 '천하 서원의 으뜸'이라고 불리며, 역대 문인 학자들이 경모하는 '성역 현관(賢關)'이다. 이곳은 여산 오로봉 아래에 자리잡고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풍경이 수려하고 깊다. 면적이 삼천여묘(1묘 = 666 m2)로, 당 789-805년에 낙양의 학자 이발이 이곳에 은거하여 공부하였고, 동시에 흰 사슴을 기르고 이를 즐겼다.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백록선생이라 부르고, 이곳은 마침내 백록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남당 940년에 조정은 이곳에 '여산국학'을 건립했다. 백록동서원은 이름은 북송 초년에 악록, 수양, 숭양과 함께 4대 서원으로 시작되었다. 남송 1179년에 이학가 주희가 임명한 남강의 지군이 백록서원을 전면 부흥시켰다. 신중국 수립 이후 당과 정부는 백록동 서원은 문물 보호를 매우 중시하여,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 및 국가급 자연보호구로 공포하고, 여산을 세계문화경관의 중요 풍경구역으로 공포하였다. 유엔 전문가의 숙소 시찰의 첫 번째 장소입니다。(출처, 백록동 서원 안내문)
우리(칠곡향교와 팔거역사문화연구회) 일행은 여산식물원과 “이 폭포를 보지 않으면 여산을 봤다고 하지 말라”고 한다는 삼천첩폭포(3단의 높이 215m)를 보고 백록동서원으로 갔다. 이곳이 조선 유학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소수서원(紹修書院) 모델이라고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관람 시간이 짧은 데다 가이드도 내용을 잘 모르고 한글 안내문도 더러 있으나 너무 간략해 답답할 뿐이었다. 외양만 보고 인증사진만 찍을 뿐이다.
특이한 일은 광서(光緖, 청나라 광서제 연호) 4년 즉 1878년, (우리나라 고종 15) 영남(嶺南) 조병준(曺秉濬)이 계화(桂花) 즉 계수나무를 심었다는 표석이 었다. 영남이 경상도의 다른 표현이고, 잡을 “병(秉)”자를 돌림자로 쓰는 창녕조씨들이 주변에 많아 혹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지.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와서 기념 식수를 하고 빗돌까지 세웠는지 궁금했다.
귀국 후 창녕조씨 대종회를 찾아 확인해 보았으나 족보에도 없었다. 당시 불편한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일제강점기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중국 어디에 살고 있는 일족이 아닐까 하는 말을 들었다.
조선 500년은 주자학이 주류였다. 퇴계나 율곡, 한강은 물론 우암 등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이 아니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했다. 그들과 신재도 가지 못했던 백록동서원을 시절을 잘 만나 찾아볼 기회를 가진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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