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의 진달래밭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寧邊) 약산(藥山)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전 국민 애송시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기 딱히 어느 소녀를 연모하지 아니하였지만 막연한 그리움으로 한 번쯤 외어 본 시 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상도 사투리로 참꽃으로 불리는 이 아름다운 진달래꽃에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으니 십여 리나 되는 초등학교를 걸어 다녔고, 하굣길에는 냇가에서 가재를 잡으며 놀고, 시장기가 돌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분지(멱쇠채의 의성지방 방언)와 진달래꽃을 따 먹었다. 그때에는 한센병 환자들도 많았다. 많이 핀 곳에 가면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꽃을 따러 간 아이를 잡아 간(肝)을 꺼내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꽃이 많은 곳 즉 먹거리(?)가 많은 곳은 겁이 나서 가지도 못했다.
그런 시절을 보낸 소년이 소위 출세(?) 하여 한 도시의 산림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진달래꽃은 시뿐만 아니라, 이원수의 <고향의 봄>에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수로부인(水路夫人) 조의 헌화(獻花)의 꽃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 민족과 친숙한 꽃이다. 북한의 국화(國花)가 지금은 함박꽃나무이나 한때는 진달래꽃이었다. 또 진달래는 다음과 같은 슬픈 이야기도 전해 온다.
“중국의 촉나라에 망제라는 왕이 어느 날 문산을 지날 때 산 밑을 흐르는 강에 물에 빠져 죽어 있는 시체 하나가 떠 내려와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이상히 생각한 망제가 그에게 물으니 ‘저는 형주 땅에 사는 별령(鱉靈)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졌는데 어찌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망제는 하늘이 자신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 준 것이라 믿고 집과 벼슬을 내리고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망제는 그때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했다.
정승 자리에 오른 별령은 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품고 대신과 내시들을 자기 심복으로 만든 다음 정권을 휘둘렀다. 때마침 별령에게는 천하절색인 딸이 있었는데, 그는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사를 장인인 별령에게 맡기고 주색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이런 사이 별령은 대신과 짜고 망제를 나라 밖으로 추방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타국으로 쫓겨난 신세가 된 망제는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울기만 했다.
울다가 지쳐서 죽었는데, 한 맺힌 그의 영혼은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 (不如歸) 즉 돌아가지 못함을 슬퍼하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 한이 맺힌 피가 흘러내려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붉어졌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진달래가 산이 헐벗어 잘 자랄 수 있었던 그때와 달리 숲이 우거지면서 설 자리가 점점 줄어져 집단으로 자라는 곳이 대구 시역(市域)에는 없었다. (비슬산 진달래 군락지는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산불이 나서 새로 나무를 심어야 할 곳이나 아직도 더 심어야 할 곳 중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원이나 고속도로, 국도변의 어느 한 곳에 영변의 약산과 같은 진달래꽃밭을 크게 조성하여 시민들이 시심에 젖게 하고 옛 정취를 되살려 보고 싶었다.
선택된 곳은 팔공산 동화집단시설지구 초입 산불이 난 곳과 앞산의 산성봉 부근, 와룡산의 금호강 주변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했다. 특히, 와룡산 북록(北麓) 금호강 쪽은 몇 년 전에 산불이 나서 큰 나무는 다 죽고 몇 그루 진달래만 살아나 듬성듬성 꽃을 피우고 있어 조금만 더 심으면 큰 군락지가 될 것 같고 꽃이 만발하면 교통 체증으로 금호대교에 멈춰 서 있는 운전자들이 짜증을 덜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를 심은 곳도 마찬가지지만 주기적으로 거름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잘 자라게 해야 하는데, 산에서는 억새 등 건조한 곳에서도 자람이 왕성한 풀들이 많아 사후 관리에 신경을 더 써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있어 소홀하게 다루어져 거의 도태(淘汰)되고 말았다.
묘목을 구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 토종 진달래를 키워 놓은 농장이 없어 부득이 일본에서 개량되어 들어온 영산홍 계통(산철쭉이라고 하나 이 역시 우리나라 산철쭉과 다른)의 품종이다 보니 메마른 산지(山地)에는 맞지 않았다. 잡초만 무성한 그곳을 지날 때마다 면밀하게 검토해 보지 아니하고 실행하여 시민의 세금을 낭비한 데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현직에서 물러나 다 잊고 있었던 어느 날 서구청 박치용 계장(달성군 공원녹지과장으로 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중현 구청장이 새로 취임해 서구를 상징하는 구화(區花)를 진달래로 바꾸고 와룡산에 대단지 진달래 군락지를 조성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물었다.
장소는 그 전 현직에 있을 때 조성했으나 사후 관리 잘못으로 실패했던 지금의 자리를 추천해 주며 평지와 달리 산에 심을 때에는 토양도 살펴보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력이 강한 잡초를 자주 뽑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외 토종 묘목을 구하기 어려운 점, 현장이 보기보다 경사가 급한 지역이라 인부들이 일할 때 떨어지지 않도록 현장 지도를 철저히 해야 할 점등을 강조했다.
그 후 박 계장도 서구청을 떠났고 세월도 상당히 지났다. 하지만, 다른 후임자들에 의해 잘 관리되어 진달래꽃이 필 때 일대는 장관을 이룬다. 처음 계획은 실패했지만, 박 계장이 더 좋게 만들고, 이어 다음 후배들에 의해 명소가 되어 등산하는 시민들은 물론 금호대교를 이용하는 많은 외지인의 사랑을 받아 인터넷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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