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리 금강송 숲의 지킴이 일명 왕송 이 이름을 산지기 명길나무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소광리황장봉계표석(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300호)”
소광리 금강송 숲의 일부
소광리 금강송 숲을 찾는 시민들
보호수 표지석(남부지방산림청장)
소광리 금강송 숲의 왕송을 “산지기 명길 나무”라고 부르자
울진(蔚珍)은 풀 이름 울(蔚), 보배 진(珍)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이 “풀(나무)이 보배로운 곳”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천연기념물로 수산리 굴참나무(제96호), 후정리 향나무(158호), 화성리 향나무(제312호), 쌍전리 산돌배나무( 제408호), 행곡리 처진소나무(제409호)와 경상북도 기념물로 주인리 황금소나무(제151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불영사계곡(명승 제6호), 통고산자연휴양림, 금강소나무 숲길 등 아름다운 승지와 숲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울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금강송 숲으로 2015년 서면(西面)을 금강송면(金剛松面)으로 바꾼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소광리 일대의 금강송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나무 숲으로 소나무를 연구하는 학자나 관계 공무원은 물론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 숲에서 영감을 얻으려는 예술가. 지친 일상을 치유하려는 시민들이 찾는 이른바 “국민의 숲(?)”이 되었다.
소나무가 한반도에 자리 잡은 것은 2억~1억 7,000만 년 전쯤이며, 우리 조상이 정착한 것은 8만 ~3만 년 전이라고 하니 한반도는 오랜 기간 소나무가 주인이었다. 그 후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맞으면서 자연상태의 숲은 가옥, 농기구, 가구제작, 경작을 위한 개간과 화전, 묘지 등으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목재소비량도 증가해 국가가 보호하지 않으면 군선(軍船)을 만들거나 궁궐(宮闕)을 짓는데도 큰 문제가 발생 될 수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이 금송(禁松) 즉 소나무 벌채를 제한하는 제도를 수립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수단의 하나가 봉산(封山)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나무 보호 정책은 오늘날이라고 달라지지 않아 60년대 송충이 잡기, 80년대 솔잎혹파리 방제, 현재 소나무 에이즈라고 부르는 재선충병 방제로 이어지고 있다. 소광리 금강송도 이런 봉산 제도와 오지로 벌채목의 운반이 어려운 여건으로 여타지역의 소나무와 달리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시민들이 소광리 금강송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일반 소나무와 달리 수형과 재질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와 구분해서 춘양목(春陽木), 강송(鋼松), 또는 금강송(金剛松)이라고 한다.
금강송은 자라는 곳이 금강산을 비롯하여 강릉, 삼척, 봉화, 울진 등 태백산맥 일원이라는 데서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강송, 또는 금강송이라 하고, 봉화지역에서 벌채한 나무는 주로 춘양역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어 춘양목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이는 편의적인 이름일 뿐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소나무, 곰솔 잣나무, 섬잣나무, 눈잣나무, 만주곰솔 등 소나무류 6종에는 포함되지는 않는다.
금강송의 특징은 줄기가 곧고, 수관이 좁으며 곁가지가 가늘고 짧으며, 지하고 이하의 줄기가 길고, 껍질의 색깔이 아래쪽은 회갈색이고, 위쪽은 황적색이며, 나이테가 균등하고, 심재(心材)가 황색을 띠며 목재가 잘 뒤틀리지 않는 점이다. 또한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하는 데 심재가 사람의 창자와 같이 황색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줄기가 곧은 금강송이 특정 지역에만 분포하는 이유를 임경빈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은 지역이어서 눈의 압력 즉 설압(雪壓)을 견딜 수 있는 곧은 줄기의 소나무만 살아남게 되고 굽은 소나무는 도태되어 세대가 거듭되는 데 따라 곡간성(曲幹性) 유전자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알래스카나 캐나다의 눈이 많은 지역의 소나무와 같은 현상이며 소광리 소나무의 수형은 눈이 만들어낸 조형물”이라고 했다.
소광리 금강송 숲도 황장산(黃腸山)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가지 사실은 첫째가 소광리 마을 초입의 “소광리황장봉계표석(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300호)” 이다. <문화재청>의 안내문은 “봉산(封山: 나라에서 일반인들이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의 경계를 표시한 표석이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높이는 195㎝ 정도이다. 앞면에 새긴 표석의 내용은 황장목의 봉계지역은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의 네 지역을 주위로 하고 이 지역을 ‘명길’이란 산지기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소광리 금강송은 황장산이며 그때 이 산을 지킨 사람은 산지기 “명길” 이었다. 두 번째는 탐방 안내소 입구의 수령 500년(지름 96cm, 수고 25m)의 소나무이다. 남부지방산림청장이 1995년 3월 30일에 보호수로 지정하면서 그 사유로 “금강송 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이 숲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어 특별히 보호하고자 한다.”고 했다. 즉 조선 시대 황장산의 유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왕송(王松), 또는 대왕송(大王松)이라 부른다. 크고 위엄있다는 뜻이겠지만 너무 평범한 이름이다. “산지기 명길나무”로 지어주고 싶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숲을 지켜낸 산지기 명길의 명예회복시켜 주고 그로 인해 이 숲이 보존되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명품 숲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기념하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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