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석문 정영방의 아내 류씨 부인이 가져온 서석지 은행나무

이정웅 2020. 1. 10. 14:23


석문의 부인 전주류씨가 친정 무실에서 가져와 심은 은행나무

우리나라 3대 민가 정원의 하나인 서석지와 경정

석문으로 인해 우리나라 자생설이 확인된 모감주나무



석문 정영방의 아내 류씨 부인이 가져온 서석지 은행나무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는 보길도의 세연정, 담양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가 정원의 하나로 꼽히는 서석지(瑞石池, 국가민속문화재 제108)가 있다. 유학자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글을 읽던 경정(敬亭)에 딸린 정원이다.

<문화재쳥>의 자료에 의하면 정영방이 광해군 5(1613)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둔하였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선 시대 민가의 정원으로 연못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자양산 남쪽의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과 주일재를 배치하고, 이들을 담장으로 둘러싼 후 담장 밖 북쪽에 수직사를 두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은 연못 쪽으로 내밀어 돌로 쌓은 단을 만들고 그곳에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어 사우단이라 이름 지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과 반대편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는데 이를 읍청거, 토장거라 불렀는데, 읍청거는 맑은 물이 뜨는 도랑, 토장거는 더러운 물을 토하는 도랑을 의미한다.

연못의 이름을 서석지라 한 것은 못 속에 여러 개의 기묘한 돌 무리가 있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읍청거 쪽 못 바닥은 암반이 울퉁불퉁 솟아난 모습이 마치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듯한데, 19개의 돌 무리가 물속에 잠기거나 드러난 채로 있다. 이 돌 무리들은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들로 그 생긴 모습에 따라 신선이 노니는 돌(선유석), 구름 봉우리 모양의 돌(상운석), 물고기 모양의 돌(어상석), 별이 떨어진 돌(낙성석) 등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자연재료를 인공적으로 가공, 배치하여 정원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선조들의 이상적인 자연관을 엿볼 수 있어 조선 시대 민가 정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석문(石門)1605(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고,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牛伏) 정경세(鄭經世)가 스승이며 여러 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광해군의 실정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넷째 아들 제()와 함께 깊은 산골 영양으로 거처를 옮겨 산 분이자 아름다운 서석지를 후세에 남긴 독특한 분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모감주나무를 조경수로 가장 먼저 활용한 분이다. 지금도 서석지 외곽에 모감주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석문이 노년에 다시 안동으로 돌아가 은거한 송촌동에도 모감주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50)가 있다. 둘째 아들 행()이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좋아하던 나무라고 하여 영양 자양산에 가서 캐와 1651(효종 2)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자료는 최근까지 모감주나무가 중국이 원산지이며 열매가 해류를 타고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모래사장에 닿아 싹이 터서 군락(천연기념물 제138)을 이루었다는 열매 해류이동설과 정면으로 배치(背馳)된다. 즉 영양은 내륙 깊숙한 곳에 있어 해류를 타고 왔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 석문이 영양에 은거한 때가 1600여 년대인 것을 감안하면 400여 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므로 중국 원산지 설과 배치된다.

즉 석문은 이름난 유학자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조경가이자 모감주나무가 우리나라 자생한다는 것을 확인한 식물학자이기도 하다. 훗날 필자에 의하여 내륙도시 대구 동구 내곡동에도 군락지(대구시 기념물 제8)가 발견되어 우리나라 자생설이 더욱 굳어졌다.

서석지를 찾으면 가장 먼저 만나는 나무가 큰 은행나무다. 뿌리는 담장 안에 있지만 많은 줄기가 밖으로 나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석문의 부인 전주류씨가 친정 곳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일명 무실에서 가져온 나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석지는 부인 류씨의 행단(杏壇)으로 인해 유학자가 지향하는 원림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석지는 부인과 합작품이 된다. 류씨 부인의 친정아버지 유복기(柳復起, 1555~1617)는 아호가 기봉(岐峯)으로 전주류씨 안동 입향조 유성(柳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 김진(金璡)의 딸이다. 김진은 극일, 수일, 명일, 성일, 복일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3명은 대과, 2명은 소과에 합격시켜 이른바 오룡지가(五龍之家)를 이룬 분이다.

기봉은 외숙 김성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구와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예천 등지에서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를 따라서 화왕산성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굶주리고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힘썼으며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저서로 기양세고, 기봉선생일고가 있으며 훗날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난 후손들이 많이 나와 전주류씨를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쌓았다.